위대한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개역개정)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3:1상, 현대인의 성경).

 

 

 

미국에서는 오늘 6월 18일을 ‘아버지 날’(Father’s day)로 지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금년 5월 둘째 주일(14일)을 한국식으로 “어버이 주일”로 지켜서 따로 “아버지 주일”로 지키지 않기지만 설교는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 제목을 “위대한 아버지”라고 정하게 된 것은 지난주에 고 심수은 사모님의 “천국환송예배” 때 그녀의 남편인 김준학 목사님이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가리켜 “위대한 엄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위대한 아버지”란 제목 아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두 분의 아버지들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제가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해서 묵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창세기 22장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2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시험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2절).  즉, 하나님의 시험이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제물을 태울 나무를 준비하여 두 종과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22:3,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도 속히 순종했는지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보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4-5절).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그는 그의 종들에게 “내가 아이(이삭)과 함께 저기 (모리아 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는지 놀랍습니다.  분명히 그는 “우리가”라고 말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를 드린 후 “우리”인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삭이 그의 두 종에게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놀라운 점은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기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라고 물었을 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8절).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는 이삭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8절)  그 “번제할 어린 양”은 바로 자신의 아들 이삭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를 제일 놀랍게 하는 점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은 후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9-10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 “순간”까지(10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2절)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인데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히11:17, 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하셨는데(18절)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자손이 이삭을 묶어 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내리 치려고까지 했던 것일까요?(창 22:9-10,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까지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히11:19, 현대인의 성경).  즉,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칼로 이삭을 내리쳐서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에 천사가 그에게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말아라”(창22:12,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 칼을 잡고 자기 아들 이삭을 치려고 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말한대로 하나님께서는 “한 숫양”이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13절).  그리고 그는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례”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입니다(14절).

 

저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왜 그가 적어도 제가 보기엔 위대한 이삭의 아버지인가 하면 한 마디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100세 때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받치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그가 미루고 또 미루어서 하는 수 없이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창22:3,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믿기지 않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은 후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9-10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렇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기에 이정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 생각합니다[(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그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그리고 능히 이루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로마서 4:18-21).  이러한 믿음의 아버지는 위대한 아버지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다시금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가서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나무 위에 올려 놓은 후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치려고 했던 것을 생각합니다(창 22:5-6, 9-10,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막1:11, 현대인의 성경; 요3:16)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사53:6, 12, 현대인의 성경) 해골이라고 불리는 골고다로 가셔서(마27:33) 로마 군병을 통해 저주의 나무(신21:23; 갈3:13)인 십자가에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못 박으신 후 창으로 자기 아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게 하셨다(요19:34, 현대인의 성경)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의 말씀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이삭을 묶어 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칼을 잡고 이삭을 치려고까지 했습니다(창22:1-2, 9-10).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11-12절).  아브라함은 자기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13절).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 지르셨을 때(마27:46) 독생자의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사야 53장 10절 상반절을 보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이 상함 받는 것을 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이 상함 받는 것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독생자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독생자 예수님이 상함을 받으시길 원하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53장 10절 하반절을 보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이 속건제물로 십자가에 받쳐지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the good pleasure of the Lord)은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길(12절) 원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독생자 에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기뻐하실 정도로 우리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고 구원해 주시길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53장 11절을 보면 독생자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만족히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이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셨습니다(11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이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는 것을 만족히 여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고 기뻐하셨으며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셨기에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시는 것을 만족히 여기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길 원하시고 기뻐하셨고 만족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고 김주영과 그 이후로 선물로 주신 딜런, 예리, 예은이의 아버지가 된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6월 18일, 아버지 날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느 누구보다 제일 사랑하는 세 자녀들의 마음과 삶 속에 역사하시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살게 하고 계심을 아버지로서 엿보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