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정을 공격하는 간교한 사탄
[사무엘하 13장 1-3절]
가정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전투의 전략”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탄은 하와가 아담의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할 때 둘 사이를 갈라놓으므로 그 가정을 공격했다. 하와는 남편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행동했고, 오히려 남편을 죄로 이끌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결혼을 하면 사탄은 그 가정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 만일 배우자 중 어느 한 명이 또는 두 사람 모두 결혼하기에는 미성숙한 자들이라면 사탄은 얼마든지 공격의 틈을 찾아낼 것이다. 또 결혼한 부부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부모를 떠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부모들이 끼어들 틈을 주었다면 사탄이 그 결혼을 공격하기란 너무나 쉽다"(위어스비).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창세기에 인류의 최초의 부부를 사탄이 공격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창3장). 부인인 하와가 남편인 아담의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할 때 사탄이 그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말, 그래서 하와는 남편 아담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행동(선악과를 따 먹음)했고 그리고 남편을 죄로 이끌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 아담도 사탄의 공격을 받아 영적 권위를 발휘하지 못하고 유혹에 빠진 부인 하와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위어스비 목사님의 말처럼 지금 얼마나 많은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자기 부모로 하여금 부부 관계에 끼어들 틈을 주므로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까? 특히 남편이 자기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의 결혼 생활에 끼어들 틈을 주므로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 관계의 불화를 보면 사탄은 남편과 아내의 갈등을 지극히 작은 문제도 충분이 극대화하여 부부의 위기로 몰아갑니다. 부부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주님은 부부의 다른 점들을 남편과 아내로 하여금 보완(complement)하게 하시지만 사탄은 서로 비교(compare)하게 만들든지 아니면 다른 잉꼬부부(?)랑 비교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불만족 및 불평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부부로 하여금 서로의 단점을 극대화하여 서로의 장점을 극소화 시켜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주님은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주셨습니다(마 22:37, 39).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우리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사(롬5:5)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더욱더, 점진적으로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고 계십니다(갈5:22).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그 계명에 순종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온 가족이 한 마음 한 뜻으로(빌1:27; 2:2) 함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서로를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정은 천국화 되어가므로 천국의 기쁨(요15:11; 요일1:4)과 사랑(시33:5)과 평화(롬15:13)가 충만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불순종하게 만들고 있으며(엡2:2; 5:6) 도리어 지옥의 계명인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창37:5; 신22:13; 마24:10; 요일2:9). 또한 거짓의 영과 더불어 사탄은 미움을 우리에게 자꾸만 심어서(신21:17; 삼하13:15; 잠10:12) 어두움의 일을 하게 만들므로(사29:15; 겔 8:12; 엡 5:11) 가정의 쓴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롬7:5).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같은 집에 가고 싶지 않게 만들고 있으며 도리어 집 밖에서 맴돌게 만들던지 더 나아가서 집에서 멀리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식구들을 보고 싶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배우자를 더욱더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우자를 향한 커지는 미움 속에서 그 부부 관계의 균열의 틈을 노려(참고: 느4:3, 히브리어로 "틈"; 6:1)사탄은 다른 여자/남자를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고, 안목의 정욕과 더불어 육신의 정욕으로(요일2:16) 그 다른 이성을 탐하게 만들므로 결국에는 외도하게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탄은 우리 가정을 무너트리고 파괴하므로 가정 천국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며 도리어 우리 가정을 지옥과 같은 가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가정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3장 1-3절을 보면 간교한 사탄의 공격을 받은 다윗의 가정에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이야기 중심으로 사무엘하 13장과 14장 말씀 중심으로 한 3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우리 각 가정에게 적용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교훈을 우리가 우리 가정에게 적용할 때 지금 얼마나 간교한 사탄이 우리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가 인식(aware)하며 인정(acknowledge)하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How?) 이 영적 싸움(spiritual battle)을 잘 싸워서 승리하는 가정(victorious family)으로 더욱더 세움을 받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어서 간교한 사탄의 공격을 대적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3장 1-3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제가 2018년 9월 마지막 주일 영어 예배 때 예배에 참석한 고등학생부터 청년들까지 형제, 자매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때 저는 이러한 답변을 들었습니다: (1) "Trust"(신뢰), (2) "Communication" (대화), (3) "Supportive"(지지하는 것), (4) "Sacrifice"(희생), (5) "Respect"(존중), (6) "Loyalty"(충성).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알게 하셔서 대화를 해 보면 그 관계에서 신뢰(trust)가 그리도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신뢰가 깨져서 서로를 향하여 의문하고 의심하며 심지어 불신하기까지 하는 경우를 봅니다. 또한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나 대화(communication)가 참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남자나 여자나 서로의 대화법을 잘 모르고 자기 대화법으로만 상대방 이성에게 대화를 계속 하다 보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봅니다. 이 외에도 이성관계나 부부관계에서 남녀가 서로 지지하는 것(supportive)이나 희생하는 것(sacrifice)이나 서로 존중(respect)하는 것이나 그 관계에 충성(loyalty)하는 것이나 신실하는 것(faithful) 등 다 중요하지만 문제는 간교한 사탄이 공격하여 이 모든 것을 비틀어 놓는다(twist)는 것입니다. 비틀어 놓되 사탄은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에서 남녀의 감정도 공격하여 비틀어 놓아서 서로에게 불성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 초까지 제가 알고 있는 부부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관계를 ‘불륜 관계’나 ‘외도’라고만 말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처음으로 들은 단어가 바로 “emotional cheating”(감정 속임수)입니다. 제가 이 단어를 작년 2월 말에 부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인 자매에게 들은 말인데 저에게는 좀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몇 년 전에 어느 자매가 자기 남편하고 이혼한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자기 남편하고 'emotional connection'(감정 연결)이 안되서 이혼했다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든 생각이 부부 관계에 있어서 '감정'(emotion)이 이정도로 매우 중요하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emotional connection'(감정 연결)이나 'emotional cheating'(감정 속임수)이란 단어를 둘 다다 각각 다른 자매에게 들었는데 부인 자매들의 입장에서는 '감정'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형제들에게는 이렇게 '감정'에 관련된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오늘 본문 사무엘하 13장 1절을 보면 “그 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후”란 다윗 왕이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더불어 동침한 후(11:2-4)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5절) 자신의 간음죄를 덮고자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전쟁터에서 죽게하였는데(6-26절)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27절; 12:9) 하나님께서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삼아 낳은 아들(11:27)을 치시므로 그 아이가 심히 앓다가(12:15) 죽은 후(18절)를 말씀합니다. “그 후”(13:1)에 다윗의 아들 암논이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의 아름다운 여동생인 다말을 몹시 사랑하고 대단히 연모하므로 결국 그녀를 사모하다가 병까지 들고 말았습니다. 특히 암논은 다말이 “정숙한 처녀”였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어서 그녀를 몹시 사랑하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바로 그 때 암논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암놈의 “대단히 간교한 친구” 요나답이었습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창세기 3장에서 “여자”(하와)에게 다가온 “뱀”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1). 제 생각엔 가장 간교한 사탄은 우리가 이성 관계에 있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몹시 사랑하고 대단히 연모하여 사모하다가 병까지 들 정도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쉽게 접근해서 우리에게 “좋은 수”(good trick)가 있다. 내가 너에게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유혹(tempt)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좀 알 수 있냐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히 간교한 요나답이 이복 누이동생 다말에 대한 애정 때문에 병이 들고 날마다 수심에 잠겨 있는 암논에게 쉽게 접근하여 “침대에 누워 병든 척하고 있다가 너의 부친(아버지 다윗)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네 누이동생 다말을 보내 네가 보는 앞에서 음식을 만들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너를 위해 만든 그 음식을 다말이 직접 손으로 먹여 주면 좀 나을 것 같다고 하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삼하13:5, 현대인의 성경). 이 심히 간교한 요나답의 꼼수(trick)에는 다말과 암논의 아버지인 다윗을 개입하게 만들어(마치 부부 관계에 양가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개입하게 만들어서 부부 갈등을 일으키듯이) 결국에 가서는 암논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다말로 하여금 암논의 집에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침대에 누워 병든 척하고 있는 암논에게 밀가루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자기 이복 오빠 암논이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어 암논이 누워있는 침실까지 들어가서 직접 먹이게까지 만들었습니다. 결국 다말이 음식을 먹이려고 암논에게 가까이 갔을 때 암논은 다말을 붙잡고 그녀에게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고 강요했고 다말은 거절했지만 암논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그녀를 덮쳐 강간하고 말았음(5-14절, 현대인의 성경). 가장 간교한 사탄은 암논이 다말을 몹시 사랑하고 대단히 연모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그녀를 사모하다가 병까지 들고 있었을 때 대단히 간교한 요나답을 통해 암논에게 접근하여 그로 하여금 결국에 가서는 “이 어리석은 일”(12절)인 “그녀를 덮쳐 강간”하게 만들었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뿐만 아니라 사탄은 암논으로 하여금 다말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오로 돌변하게 만들어 다말을 사랑할 때의 그 사랑보다 더한 증오심으로 그녀를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도 어리석은 암논은 몹시 다말을 사랑하여 그녀를 욕보인 것보다 그녀를 증오심으로 미워하여 쫓아 보내는 것이 더 큰 죄인 줄 몰랐습니다(15-16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어리석은 자의 무지함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리석음을 드러냄(전10:3,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서도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참고: 스바냐 3:5,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가장 간교한 사탄은 이성 관계에서 “간교하게 속임수로”(고후12:16, 현대인의 성경) 간음의 죄와 강간의 죄 등을 범하게 만들며 사랑을 증오로 돌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그 간교함을 아시고(참고: 눅20:23, 현대인의 성경) 간교한 사탄 예수님을 시험(유혹)했을 때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셔서 승리하셨습니다(마4:1-11; 약4:7).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6:11).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간교한 사탄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간교한 사탄이 이성 관계에서 유혹을 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만일 서로 사랑해서는 아니될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그 둘 중에 한 사람이 상대방을 몹시 사랑하고 연모하고 있다면 그 둘이 한 방에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이미 간교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도록 그 두 남녀는 서로에게 건강한 경계선을 긋고 서로에게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거리보다 마음과 특히 감정의 거리를 분명하게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이성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연모하여 병까지 들정도라면 충분히 어리석은 일을 행할 위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암논의 어리석음은 그가 몹시 사랑하고 대단히 연모하는 다말의 말 대로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드려서 다말이 암논하고 결혼하는 좋은 방법을 걷어차고 그녀보다 힘이 세므로 그녀를 덮쳐 강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암논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삼하 13:1-2, 12-14, 현대인의 성경). 어리석은 자는 눈 앞에 보이는 즐거움밖에 생각하지 못하기에(전7:4, 현대인의 성경) 그의 마음이 악을 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져서(10:2, 현대인의 성경) 조심없이 함부로 행동합니다(잠14:16,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받되(14:18, 현대인의 성경) 자기의 고집대로 하다가 죽을 것입니다(1:31, 현대인의 성경).
둘째로, 간교한 사탄이 우리 가정을 공격할 때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진재혁이란 사람이 “부모의 리더십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한다”라는 제목 아래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로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바로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따르는 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인터넷). 과연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남편)들에게 권위(authority)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잘 이끌어야(lead)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권위주의적인 아버지(authoritarian father)란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빠른 결과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로는 자녀들에게 원하는 행동이나 결과는 바로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정의 가장인 우리 아버지들은 가정을 어떻게 잘 이끌 수 있을까요?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남용(abuse)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남용할 때 우리는 결코 자녀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지혜롭게 사용하여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요즘 많은 가정들을 보면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내도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다 보니 자녀들도 어머니를 본받아 아버지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권위가 남용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권위가 무시당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들을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 의탁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자녀들을 신뢰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자녀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빠른 결과는 겉으로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녀들을 신뢰하는데 헌신할 때 점진적으로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들을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하고 마음 문을 열고 일대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말이 없는 아버지들에게는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도적이 로라도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대화보다 서로의 마음 문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가 이뤄질 때 우리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잘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오늘 본문 사무엘하 13장 1-3절 문맥에 나오는 아버지 다윗은 한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가정을 잘 이끌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다윗은 아들 암논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자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몹시 사랑하고 연모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또한 다윗은 암논인 ‘침대에 누워 병든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암논이 자기에게 “동생 다말을 보내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먹여 주라고 하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 암논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6-7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그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는 것과 같은 지시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다말을 사랑하고 연모하여 사모하여 병까지 든 암논에게 다말로 하여금 그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암논은 다말을 강간했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 책임이 아버지 다윗에게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말이 암논의 집에 가는 것은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고 사슴이 올가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생각합니다(잠7:22, 현대인의 성경). 물론 이 모든 간교한 계획의 실행은 심히 간교한 요나답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저는 암논과 다말의 아버지인 다윗도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일 후에 이복 오빠인 암논에게 강간을 당한 다말은 자기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압살롬은 암논이 자기 동생 다말을 욕보인 일로 그를 미워하여 그와 일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삼하 13:20, 22, 현대인의 성경). 그로부터 2년 후에 압살롬은 잔치를 베풀어 모든 왕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도 초청했습니다(23-24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아버지 다윗은 압살롬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아 그 잔치에 가지 않고 압살롬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그러시다면 내 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하자 다윗 왕은 “암논이 너와 함께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압살롬이 계속 간청하므로 다윗왕은 암논이 압살롬과 함께 가야 할 이유를 모르면서도 암논과 다른 모든 왕자들을 압살롬과 함께 보냈습니다(27절, 현대인의 성경). 자식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아버지 다윗은 그 자식이 자기에게 간청하는 영문도 모른 체 그가 계속 간청하므로 결국 압살롬의 간청을 들어줬습니다. 그 결과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습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그 2년 동안 압살롬은 자기의 여동생을 욕보인 암논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얼마나 복수의 칼을 갈았을까요? 그 와중에 아버지 다윗은 암논이 다말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기만 했습니다(21절). 성경은 아버지 다윗이 어리석은 아들 암논을 사랑으로 징계는커녕 책망을 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 다윗이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내고 있었던 자기의 딸 다말을 찾아가 위로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나라의 일을 하느라 무지 바빠서 가정 사역을 할 시간이 없었나 봅니다.
마지막 셋째로, 간교한 사탄은 우리 가정을 공격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루 프리올로(Lou Priolo)는 그의 책 "Resolving Conflict"(갈등 해결)에서 왜 우리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지 또는 왜 우리가 배우자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당신이 그들에게 입은 상처(hurts)와 그 상처들을 준 그 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깊은, 큰) 상처를 입혔 때 당신의 마음의 밭에는 쓰라림(bitterness)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쓰라림의 씨앗이 좀 싹이 날 때에 그를 용서하므로 뿌리채 뽑지 않고 오히려 그가 당신에게 입힌 상처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므로 재배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상처에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에 쓰라림이 생긴 것입니다. 쓰라림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용서란 당신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사람과 그 상처를 통해서도 역사하시사 영광을 들어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좋은 예가 요셉)’(프리올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자기를 미워하고 자리를 죽이려고까지 한 자기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는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다가 110세에 죽었습니다(창 50:21, 26).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었을까요?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에(시34:8) 자기를 해하려고 했던 형들에게 선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엡 2:10). 다시 말하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았기에(창50:20; 참고: 롬12:2) 그는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여 죽을 때까지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를 해하려고 한 악한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를 위로하며 보살펴 주기까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그가 우리를 해하려 한 악한 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아가심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깨닫게 하실 때에 만이 가능합니다. 이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3장 1-3절 문맥을 보면 압살롬은 암논이 자기 동생 다말을 욕보인 일로 암논을 미워하여 아마도 2년 동안 그와 일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22-23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 2년이 지난 후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으므로 도망하여 그술에서 3년간 지냈습니다(38절). 결국 압살롬은 5년 동안이나 아버지 다윗과 대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아버지 다윗(39절, 현대인의 성경)은 도망간 압살롬을 3년 동안이나 찾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가 건강해 보이진 않습니다. 결국 요압 장군이 다윗 왕이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자 한 사람을 데려오게 하여(14:2, 현대인의 성경) 그녀에게 할 말을 일러준 후 다윗 왕에게 보냈습니다(19절, 현대인의 성경). 그 지혜로운 여자가 다윗 왕에게 “대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보니 죄 있는 사람처럼 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다윗 왕은 그 여인의 집안 문제는 자기가 맡아서 아무도 그녀의 남은 한 아들[다른 아들과 서로 싸우다가 쳐죽인 아들(6절, 현대인의 성경)]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8절, 현대인의 성경) “내가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11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망명 중에 있는 아들 압살롬을 왕궁으로 데려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는 그 지혜로운 여자가 보기에 “죄 있는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다윗 왕은 “죄 있는 사람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는 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죄란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죄입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 암논을 죽인 다른 아들 압살롬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 가서 다윗은 압살롬을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했지만(21절) 그로 하여금 자기 집에 가서 머물러 있게 하고 자기 앞에 2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압살롬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24, 28절, 현대인의 성경). 그 말은 혹시 압살롬이 암논을 2년 동안 미워했듯이(그를 죽이기 전까지) 다윗은 압살롬을 2년 동안 미워했던 것이 아닐까요? 아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2년 동안 있으면서 아직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 다윗왕을 뵈려고 요압 장군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중재역을 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지만 요압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하는 수없이 압살롬은 자기 하인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게 해서 결국 요압을 만났습니다(30-31절, 현대인의 성경). 그때 압살롬은 요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은 당신을 왕에게 보내 왕이 나를 볼 생각이 없었다면 무엇때문에 나를 그술에서 데려왔는지 한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내가 차라리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좋을 뻔하였소. 이제 나를 왕과 좀 만나게 해 주시오. 만일 나에게 죄가 있다면 왕이 나를 죽여도 좋소”(32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압살롬의 행동과 말을 생각할 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그리워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다윗은 자기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놓고서도 2년 동안이나 한 번도 만나주지 않으니까 자기가 차라리 그술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요압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그 사람 사이에 거리를 멀리 두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지만, 용서하는 마음은 서로의 거리를 좁힙니다. 아무리 그리운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진심으로 아들 압살롬을 용서했다면 그술에 3년 동안이나 있으므로 못보았던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데려오게 해 놓고서 또 다시 2년 동안이나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용서한 자식을 5년 동안이나 안 보고 지낼 수 있습니까? 제가 볼 때 다윗은 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식을 용서하지 않은 아버지였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다윗이 그의 생애 동안 범한 중대한 죄 중에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한 죄가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멀리하면 할 수록, 그는 하나님과도 멀어져 있었습니다(피터슨).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만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도 멀어져 있습니다.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 또한 가족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엡 4:32, 현대인의 성경).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This Age)에 속한 사람들은 "죽어도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다가오는 세상(The Coming Age)에 속한(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용서하신 것처럼 죽기까지 용서합니다(눅 23:34; 고전 15:40, 48, 49; 빌3:20; 요일 5:19).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을 행했을 때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잘못함의 많음과 크기를 보기 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많음과 크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 또한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마음으로 용납하여 전보다 더욱더 사랑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심히 간교한 사탄은 지금도 요나답 같은 심히 간교한 사람을 배후조정을 하여 다윗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을 공격하여 파탄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어서 간교한 사탄의 공격을 대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세우길 원하시지만, 사탄은 우리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길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 및 이웃 사랑이라는 천국의 계명을 주셨지만, 사탄은 서로 미워하라는 지옥의 계명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온 식구가 다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자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수 없이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함. 간교한 사탄이 우리 가정을 공격할 때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 중요한 가정 안에서 가정의 가장인 남편이자 아버지의 영적 건강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남편은 아내의 영적 건강을 위해 사랑으로 배려하고 지도하고 노력하고 등등 있겠지만 지혜로운 아내의 입장에서는 내가 좀 희생해서라도 가정의 가장인 남편의 믿음 성장 등을 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든 아버지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아버지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한 아버지들이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아버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죄 지은 식구를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주님 중심된 가정으로 세워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3월 18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간교한 사탄의 가정 공격과 싸워 승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