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죄

 

 

 

[에스더 1장 11절 말씀 묵상]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게 하라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에스더 1장11절)



       추락하는 남편의 권위,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때에 저는 한 두가지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Feminism (남녀동권주의)입니다.  여성의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표면적으로 느끼고 또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사상은 성경의 어긋나있기에 결국 여성의 권리 회복이란 "약"이 남편의 권위 추락이란 "병"을 주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는, 남편의 무책임함이 남편의 권위가 추락하는 원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또한 가장으로서 우리 남편들이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경제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남편의 권위가 추락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남편의 권위가 추락하므로 오는 현상은 남편의 권위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남편들에게 주신 성경적 권위를 감당 못하므로 그 권위를 오히려 남용하므로 결국은 권위주의적 남편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위주의적 남편은 아내에게 어떠한 죄를 범하는가 오늘 에스더 1장 말씀 중심으로 폐르시아 (지금 "이란")왕 아하수에로가 자기 부인인 왕후 와스디에게 범한 세가지 죄들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에스더 1장1-9절을 보면 3 잔치들(banquets)이 나옵니다.  첫번째 잔치는 180일(약 6개월)동안 "모든 방백들과 신복을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이 베푼 것입니다(3절).  그 목적은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두번째 잔치는 도성수산 대소인민들을 위하여 7일동안 아하수에로 왕이 베푼 것입니다(5절).  이 두 잔치들과 대조적으로 에스더 저자는 한절( 9절)로 왕후 와스디가 베푼 잔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조는 왕후의 잔치가 초라하게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왕은 두번이나 잔치를 베풀면서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 이십칠 도를 치리하는 왕(1절)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고자 했던 반면에 나중에 가서야 자기 아내를 나타내고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11절).  특히, 두 번째 잔치를 보면 대소 인민(from the greatest to the least)들을 초청해서 각 사람으로 마음대로 하게(8절)하면서 자기의 풍부한 대로 잔치를 베풀었지만(7절) 그러나 자기 몸인 아내를 위해선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잠잠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가 대소 인민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자기 아내에게 준 것입니다.  만일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라(엡5:28)는 성경 말씀을 순종을 했다면 그는 그의 아내 왕후 와스디를 그렇게 초라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처럼 우리 남편들도 우리 아내들을 귀히 여기지 않는 죄를 수 없이 많이 범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우리 남편들이 변론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러한 느낌을 우리 남편들이 주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느낌을 주므로 아내의 가치가 너무나 초라하게 비춰질 때에 아내들은 우리 남편들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아하수에로 왕은 아내에게 분노하였습니다.  

 

            분노의 죄, 이 얼마나 우리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수 없이 범하는 죄입니까?  에스더 1장10-12절을 보면 두 번째 잔치 때 아하수에로 왕이 포도주로 인하여 그 마음이 즐거웠을 때에 왕후 와스디를 일곱 어전 내시를 통해서 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왕후 와스디는 왕명을 좇아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12절).  그랬을 때 아하수에로 왕은 진노하여 중심이 불붙는 듣하였습니다(12절).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가 합당한 것인가 입니다.  아내는 당연히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왕후 와스디는 왕명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왕후 와스디는 그 당시 페르시아의 법을 좇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 당시 페르시아 법에는 공적인 자리에서 왕적 여인들은 얼굴을 보이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왕후 와스디는 왕명은 어겼지만 나라 법은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법을 지키므로 왕인 아하수에로 남편에게도 왕권에 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은 심히 분노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이유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127도를 다스리는 왕이 한 아내를 다스릴 수 없단 말인가 하면서 왕의 자존심은 상당히 구겨졌을 것입니다.  대소 인민에게는 마음대로 하게 하고 아내인 왕후 와스디에게는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를 권위주의로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많은 때에 우리 남편들은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 나중에 아내가 맞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페르시아 법을 어기지 않았던 와스디 왕후, 그녀의 결정과 행동은 남편 아하수에로 왕에게와 그의 백성들에게 법을 따르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행동을 불순종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위엄과 권위 등이 공적인 자리에서 추락하는 순간,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으니 아내에게 분노를 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아하수에로 왕은 아내를 버렸습니다. 

 

            분노하였던 아하수에로 왕은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14절) 중에 므무간이란 사람의 말을 청종하였습니다(16절).  분명히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와스디로 인하여 분노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황의 기색"을 살피는 자였기에) 또한 야망 속에서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였기에 결코 분노하는 왕이 좋아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결국, 므무간은 왕후 와스디를 죄인취급을 하되 왕에게만 잘 못한 것이 아니라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16절).  또한 그는 왕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녀들도 그 남편을 멸시할 것(17절)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그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19절)라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과연 분노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아하수에로 왕, 왕후가 페르시아 법을 순종하여 자기에게 불순종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결국 아내를 버리라는 말을 청종하였습니다(그래서  에스더가 결국은 왕후가 되었던 것임).  그는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라(ruler in his own house)라고 조서를 내리게 하였습니다(22절).  자기 자신이 rule(원칙)을 어기고 아내를 공적인 자리에게 얼굴을 제일 마지막에 자랑하려고 했으면서 남편으로 하여금 가정에 ruler(주관자)가 되게 하라는 조서를 내리는 이 행동은 참 어이가 없는 권위주의적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 남편들이 아하수에로 왕처럼 아내들에게 죄를 범하고 있습니까?  


        아내를 귀히여기는 남편, 아내에게 성내지 아니하는 남편, 아내와 결혼하면서 맺었던 서약에 충실하는 남편, 그러한 남편이야 말로 가정에서 권위를 세우는 성경적인 남편입니다.  그러한 남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각 가정을 예수 그리스도 반석위에 세우고 계십니다.

 

 


최고의 아내와 짝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