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존경 (2)

 

 

 

            어제 새벽기도회 후 에스더 1장을 다시 묵상하면서 기도회 때 하나님 앞에서 아내에게 재 헌신한대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QT 편지’를 영문으로 써서 이 메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에스더 1장 QT 내용을 아내하고 대화하면서 약 10년전 연애할 때에 제가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와 이 메일 등을 보냈던 추억을 다시 되새기면서 이렇게 약 10년 후 다시금 이 메일을 보내되 이젠 QT 이 메일을 보내게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음이 기뻤습니다.  대화 속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저희 부부는 “그 여자가 간절히 바라는 사랑, 그 남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존경”(Dr. Emerson Eggerichs)이란 책에서도 좀 더 깊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6장은 남편이 읽어야 할 내용이고 또 다른 6장은 아내가 읽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제가 읽어야 할 6장을 다 읽은 후 아내를 알고 싶어서 직접 아내에게 각 장에 나와있는 점검 목록을 아내에게 읽어주면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또한 저를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길 원하여 아내 또한 여자가 읽어야 할 6장 끝 부분에 나와있는 점검 목록을 저에게 읽어주면서 제가 대답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참으로 서로를 더욱더 깊고 그리고 넓게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 후 밤에 잠들기 전에 오늘 새벽기도회에 읽을 에스더 2-4장 말씀을 읽다가 에스더 2장 17-18절 말씀에 놀랬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더 1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에스더 1장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와스디 왕후를 “사랑”했다는 말씀도 없고 그녀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에스더 2장에 와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했다는 말씀(17절, cf. 5:2)과 그녀를 위해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와있는 것입니다[(18절)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에스더 1장과 너무나 대조적인 면을 보면서 놀람과 더불어 ‘왜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와스디 왕후와 에스더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 두 여인의 다른점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점은 와스디 왕후는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she was lovely to look at) (NIV)]고 에스더 1장11절에 기록돼 있고 에스더는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Esther, was lovely in form and features (NIV)]라고 에스더 2장7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여인의 다른 점입니다.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는 말씀은 와스디 왕후는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 용모가 좋았던 여자로 보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여인은 어떠한 여인일까 생각해 봅니다.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는 그들이 쓴 책 “거짓말을 하는 남자 & 눈물을 흘리는 여자”에서 여자들의 외모는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능력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90퍼센트는 만난 지 4분 이내에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육체적 매력은 10초 이내에 평가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두뇌보다 미모가 뛰어난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더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04, 309면) [참고: “여자의 몸에서 남자를 가장 매혹시키는 요소”, 310면].  아하수에로 왕이 보기에 와스디 왕후는 용모가 좋아 (예뻐?) 왕은 그녀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길 원했던 것입니다(1:11).  그러나 에스더에 대해서 말씀할 때에 성경은 에스더가 사람들 “보기에” (to look at) 좋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그녀는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2:7).  여기서 ‘곱다’는 말은 ‘환하다’는 뜻이고, ‘아름답다’는 말은 ‘착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박윤선).  즉, 에스더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육체 미만이 아니고 덕스러운 미를 갖추었던 것입니다(박윤선).  이것이 바로 와스디 왕후와 에스더의 다른 점이었습니다.

서현교회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는 김희중 목사님의 “자매의 외모”란 글을 보면 그는 “외모는 은사이며 사명이다.  사명을 위해 사용되어지지 않는 은사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결론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http://club.cyworld.nate.com/club/main/club_main.asp? club_id=51432676#):

 

“우리에게 주신 외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다.  나에게 이러한 외모를 주신 이유를 알고, 나의 외모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외모, 재능, 성품....)를 하나님께 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치 않고,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은사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단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신뢰하고 있는 강점 때문에 인생을 그르치고 만다.  스스로의 외모를 자랑거리와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에만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은사와 강점을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이다.”

 

일리가 있는 견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와스디 왕후는 자기에게 주어진 미모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못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자기의 미모로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하기보다 그를 멸시(contempt) (에1:17)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떻게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을 멸시하는데 자기의 용모를 사용했습니까?  바로 남편의 초청을 거부하므로(에1:12 – “싫어하니”) 와스디 왕후는 아하수에로 왕을 멸시한 것입니다.  결국 그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부녀에게 전파되면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하는 (에1:17) 하나의 나쁜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나쁜 본보기는 우리 가정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빠에게 불순종하는 엄마를 보는 자녀들, 과연 그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까?  가정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고 또한 한 나라의 왕후가 왕의 초청을 거부했을 때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한 공적인 인물의 가정불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와스디 왕후는 왠지 사람들 보기에 용보가 좋은 미모가 있었지만 결코 에스더처럼 덕스러운 미를 갖춘 여인은 아니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와스디 왕후와 다른 용모를 지니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대로 에스더는 “단순한 육체 미만이 아니고 덕스러운 미를 갖추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덕스러운 미를 어디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까? 

 

          첫째로, 에스더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 2장9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어 …” (The girl pleased him …).  여기서 헤개란 인물은 아하수에로 왕이 거하는 수산 궁에서 궁녀를 주관하는 자로서 에스더는 그의 수하에 속하였었는데(8절) 그는 에스더로 인하여 기뻐하였기에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를 기쁘해 해주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헤개를 기쁘게 하였는지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에스더는 분명히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여인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 성경은 에스더가 ‘곱다’, 즉 ‘환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7).  남을 기쁘게 해주는 여인의 마음은 환하고 또한 얼굴도 환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른 이를 환하게 해주는 여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착한 여인입니까?  [(2:7) “아리따운” à ‘착하다’란 뜻].  그 녀는 나중에 왕후가 된후 자기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와스디 왕후와 대조적입니까? (1:9)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에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어야 다른 이에게도 기쁨을 선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알아가는데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잘 모르면 상대방을 배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면 아무리 내 안에 기쁨이 있다고 하여도 꼭 상대방에게 기쁨을 느끼게 해 줄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를 알아가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기쁘게 해줘야 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되는 것은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내 기쁨이 되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에스더는 모든 보는 자에게 은총을 얻는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 2장15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에스더는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는 자(And Esther won the favor of everyone who saw her)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에스더는 모든 보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얻는 여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에스더가 헤개(2:9) 외에도 자기를 보는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였으면 모두 다 에스더를 좋아하고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었겠습니까? 

 

            모든 보는 자들에게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을 기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친절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은혜를 베풀 때에 나 또한 그들에게 은총을 얻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베풀 줄 아는 자가 베풂을 또한 받을 줄 알지 않나 생각합니다.  은총을 베푸는 여인이 은총을 또한 겸손히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에스더는 순종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삼촌인 모르드개의 명에 신실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죽은 후에 삼촌이 모르드개가 자기를 딸같이 양육하였기에(2:7) 모르드개의 명이라면 신실하게 이행하였습니다.  모르드개의 명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말하는 것이였습니다(2:10, 20).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았던 것입니다 (2:20).  이 얼마나 착하고 신실한 여인입니까?  

 

            순종하는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남편의 말의 불순종하여 그를 존경하기보다 멸시하는 여인은 아무리 사람이 보기에 용모가 매력이 있을 찌라도 결코 덕스러운 여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덕스러운 여인은 남편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녀는 겸손히 남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말을 순종함에 있어서 전이나 지금이나 신실한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에스더는 민족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경구절은 “죽으면 죽으리이다”(4:16)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녀는 자기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하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멸살 당할 위험에 놓였을 때에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금식한 후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기에 희생할 각오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와스디 왕후가 대조적입니까?  와스디 왕후는 자기 민족을 에스더처럼 사랑한 왕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남편 아하수에로 왕에게 불순종하므로 모든 부녀들로 하여금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하게 만드는 계기를 준 왕후였습니다.  자기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멸시하였던 와스디 왕후가 어떻게 자기 민족을 사랑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민족까지 사랑하였던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에게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7:3)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민족을 하나로 연관해서 생각한 에스더는 참으로 덕스러운 여인이여 “심히 사랑스러”운 여인(5:2)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에스더 2장을 묵상하면서 와스디 왕후와 대조적으로 에스더는 참으로 그저 용모가 사람들 보기에 좋았던 여인이 아니라 덕스러운 미를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하수에로 왕이 보기에 “심히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5:2).  과연 어느 남편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아내, 자기에게 은총을 베푸는 아내, 자기의 말에 순종하는 아내,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서 아내는 와스디 황후처럼 남편 보기에 (또한 다른 사람들 보기에) 용모만 보기 좋은 아내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아내가 되야 합니다.  즉, 환하고 착한 아내가 되야 합니다.   곧, 아내는 덕스러운 미를 갖춘 여인이 되야 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10, 29-30).

 

 

 

하나님을 경외하는 덕스러운 미를 갖춘 아내인 제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7년 5월 4일, 우리 부부를 세우고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