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우리 부부는 한국 드라마를 가끔 본다 가끔 드라마 속에서 이성감정 또한 이성 관계 가운데서 상처입은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또한 상처입은 남자들은 술을 퍼마시는 모습을 보면 아내는 나에게 이해가 안되다는 식으로 한 두 세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적어도 우리 둘만의 이성관계에서 연애할 때 그 짧은 6개월 기간 동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한번 만나게 되면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연애를 정신없이 하면서 마찰과 갈등 속에서 상처를 서로 주고 받을 겨를도 없이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관계에 있어서 주고 받는 상처를 얘기한다는 것은 경험적인 측면이라기 보다 개인적인 주관적 생각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나름대로 "나의 연애관" 속에서 '상처'라는 주제를 논하지(맞는 단어인지 모르겠음) 않을 수 없는 것은 내 주위에 상처 입는 치제들이 있기에 한번 냉정하게 또한 조심스럽게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이성관계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아픔 속에서 눈물을 수 없이 흘리는 것도 상처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알고 있는 (지식으로든 전에 이성관계 경험에서든) 사람들은 이성감정을 잘 조절 혹은 절제하여 함부러(?) 이성관계를 맺지 않지 않나 생각한다.  섞불리 이성감정이 드는 자매나 혹은 형제에게 다가갔다가 (또) 상처 입기기 두려워 (혹은 싫어) 아예 이성관계를 시작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상처입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만큼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기에 '조심성' 스타일 사람들은 섞불리 이성감정에 이끌려 이성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교 때 1년 동안 짝사랑하던 후배 자매가 있었다. 왜 그 자매를 속으로 혼자 좋아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1년 동안 이성감정에 시달려 그 감정을 꾹 누르느라(suppression) 그 때 나는 겉늙었었다 (비교적으로 지금 젊어졌다는 농담도 함). 오죽했으면 대학 5학년 때 1학년 자매 한 서, 너명이 나에게 "할아버지"(Yearbook에 한글로 썼는데 다 틀리게 썼음.  2세 자매들이였기에 한글을 잘 못씀)라고 불렀었다.  자꾸만 보면 드는 이성감정... 무조건 피할 수도 없었고 한 크리스천 동아리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었고 볼 때마다 태연한 척(?) 또는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자매'로 대하려다 보니 힘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1년 동안 혼자 짝사랑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끝냈다("끝났다"라는 말이 더 적합한 단어인 것 같음).  진짜 혼자 '원맨 쑈' 한 것이다. ㅎㅎ (지금에서야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지 그 때는 ... ㅋㅋ).

 

이렇게 나 처럼 '짝 사랑' 스타일 지체들은 참 마음 고생이 많을 것이다.  한 교회 다니고, 한 부서에 있고, 그런데가가 한 소그룹에까지 있고 더 나아가서는 단기 선교는 무슨 행사에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이것은 진짜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상처를 서로 주고 또한 받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성관계 소히 말하는 상식에서는 남자가 용기를 내어 시도도 안해보고 칼을 다시 칼집에 넣는다고 뭐라고 말하지 모르겠지만 교회란 공동체에 덕을 세우기 위해선 조심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 글을 읽는 지체들 중에는 나랑 동의 안할 수 있고 안할 것이다.  좋다. 용기를 내어서 소히 말하는 기도 후에 용기를 내서 적어도 '사랑한다'는 고백은 해보고 거절당하든 말든 부딪혀 보자는 스타일 지체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두 짝 사랑만 하다 보니 (수 없이 한 것은 아님. 연애를 해보지 못하다 보니 짝사랑을 수 없이 많이 한 것처럼 느낌 ㅎㅎㅎ)  대학 졸업한 후 대학교 때 아주 가깝게 지냈던 후배 자매에게 다가가 이성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눈적이 있었다. 그 후배 자매는 대학 졸업 후에도 나를 친오빠는 아닐지라도 참(?) 오빠로 잘 따랐던 자매였다.  그래서 교회에서 섬길 때에 그 자매에게 부탁하면 쾌히 승낙하여 우리 교회와서 많이 도와줬다. 그 때 어떤 초등부 학생인가는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ㅎㅎ  아무래도 이렇게 자주 보고 만나서 교회도 함께 섬기고 하다 보니 이성감정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여름성경학교를 다 마친후 몇일 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배 자매 집 근처에 주차하고 그냥 있었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말한 후 내 이성감정을 고백해야 말하야 하나 혼자서 또 원맨 쑈했다. ㅎㅎㅎ (웃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 뒤돌아 보면 이렇게 적으면서 좀 웃긴다).  결국 용기 아닌 용기를 내어 후배 자매보로 집 앞에 있으니 좀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내가 집 앞에 있다고 하닌까 그 자매도 나온 것 같다. 그 때 나는 기도하면서 내 이성감정을 그 자매에게 나눈 후 만일 "No" 주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고 관계를 추구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결국 그 자매는 "No"했고 나는 miserable한 모습으로 차 타고 집으로 향하여 올라가면서 그 자매에게 전화해서 'No해서 고맙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이유는 그 때 내 이성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주님 안에서 확신도 없이 그 자매에게 내 이성감정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때 그 자매가 "No"하닌까 마음이 편했다.

 

결국 나는 뒤돌아 볼 때에 또한 지금 내 주위 몇 몇 지체들을 바라 볼 때에 이성관계의 시도나 관계에 있어서 상처는 서로 주고 받지 않을 수가 없는데 주로 상처를 내가 상대방에게 먼저 "주고" 그러면서 내가 상처를 "받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우리는 상처를 내가 받았다는 말에 더 공감이 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상처 입은 상태에서는 우리를 어쩌면 극심할정도로 피해의식에 잠기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은 그러한 의식 속에서는 상대방(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에게 향한 원망과 미움으로 점점 가득차게 되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은 이 상처가 나의 모든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여 자포자기 아니면 상대방을 향한 극심한 분노로 변하지 않나 생각한다.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원망과 분노까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까지도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관계에서의 상처는 참으로 치명적이다.  내 영혼까지 포기(?)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관계에서의 상처란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심각하게 말씀에 조명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모르는게 너무나 많지만 마음에 드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가고 싶다.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물론 예수님의 상처이다(물론 이성관계에서 상처를 입을 때에는 전혀 생각이 안날 확률이 많은 것 같음).  예수님의 상처를 생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또한 모든 상처를 입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예수님께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성관계에서의 상처까지 입으셨냐고 질문한다면 여기서 그것을 논하기는 좀 쉽지 않을 것 같아 넘어가고 싶다).  그 이유는 우리, 좀 더 자세히 적용하자면 "나"를 위해 대신 상처를 입으셨다는 사실이다. 뭔가 소히 우리가 말하는 이성관계에서의 상처와 전혀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성관계에서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이지 상대방을 "위하여" 혹은 "대신하여"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이성관계에서 그러한 상처를 입을 수 있다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뭔가 차원 높은 이성관계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로 드는 생각은 "상처 수용력"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나를 대신하여 상처를 입으셨다. 나는 과연 사랑하는 상대방으 대신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수용력이 있는가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참으로 놀라운 또는 성숙한 주님의 사랑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나 우리의 많은 이성관계는 상대방을 위한 또는 대신하여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수용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하여 또는 대신하여 상처를 입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상처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진정으로 주님보시기에 합당한 상처 수용력인지 아니면 내가 보기에 합당한 상처 수용력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착각 속에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을 더 나눈다면 "치유"란 단어이다.  입은 상처가 싸매어 지고 치유가 되야하는데 과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시편 147편 2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함에 있어서 먼저는 내적으로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시고 그런 후 우리의 외적 상처를 치유하시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특히 그 내적인 부서진 마음 (broken-hearted)을 어떻게 치유하시는가 생각해 볼 때 이성관계에서의 로맨틱 사랑보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치유하신가고 믿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만이 우리의 이성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치 더 큰 바다 물결이 시냇물가를 덮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간의 사랑이나 상처까지도 다 덮어질 때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연애하는 과정에서 헤어짐으로 말미암은 깊고 넓은 상처들, 모든 것이 싫어지고 사람도 싫어지고 결국은 하나님까지 싫어지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포기할찌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절대로 우리를 놓치 않으신다고 믿는다.  오히려 상처입은 사랑하며 존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들들과 딸들인 우리를 더욱더 그 사랑의 품에 앉아주시고자 찾으시며 적극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그 하나님의 품에 내 자신을 마치 요나처럼 던질 때에, 십자가의 벌리신 예수님의 팔에 앉길 때에 그의 못자국과 창자국, 상처들을 믿음으로 만지게 될 때에 내 상처들은 온데간데 없이 치유가 될 것이다.  그 치유의 역사를 위하여 이 밤에 간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관계에서 상처 입은 형제, 자매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며 치유해 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5년 7월 1일 상처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