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살래요.

 

 

솔직한 나눔이다.  이번 주 월요일(7월18일) 부모님 집에 갔었을 때 여동생 결혼 문제로 대화하는 나누었다.  여동생에게 있어 그 대화의 중점은 '독신으로 살래요'라는 뜻이 많이 내포되고 있었음을 느꼈다.

 

내 여동생은 1971년 2월29일 생이다.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노처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 2년 전 선을 본 후로 2년 동안 선을 안보고 도망(?) 다녔다.  그러다가 승리장로교회 25주년 기념 주일 선을 보게 됬다.  여동생이 보고 싶어서 본게 아니라 형제를 소개한 여 권사님이 그 형제와 함께 25주년 아예 기념 예배 참석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여동생은 화가 날만도 할텐데 화를 안내고 나중엔 식당에도 가서 함께 시간을 좀 보냈다.  물론 대화는 전혀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동생은 선을 본다면 1주일 전부터 스트래스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울려서 어머님이 전화받으면 그것도 스트래스가 되는가 보다.  선보라고 할까바...  이러다 보니 여동생은 점점 더 선보는 것을 피하고 독신 쪽으로 자기가 은사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 속에서 그런 쪽으로 얘기하는 세미나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 중에 유명한 달라스 신학교 총장 목사님이신 찰스 스윈돌의 60살이 넘으신 누님 세미나에 여동생은 갖다 온것으로 알고 있다.  아예 그 여성 모임의 회원으로도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화 속에서 아버님은 여동생의 생각을 조목조목 성경 관점에 비춰서 말씀해 주셨다.  듣고 있었던 나와 아내는 아버님의 말씀에 동의를 많이 하였다(적어도 나는).  여동생이 생각하는 독신은 좀 균형을 잃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career women들이 직장도 좋고 경제적 안정도 누리면서 홀로 사는 것을 더욱더 편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이 다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 할수는 없다.  비록 혼자 사는 것이 마음에 평안함이 있다고 해서 내가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객관적인 성경적 생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다.  무조건 마음이 평안하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는 것 위험하다.  그 이유는 모든 하나님의 뜻 수행하는 것이 결코 마음에 평안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는 고통과 눈물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마음이 평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인가보다 생각한다는 것은 충분한 성경 해석이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의 입장에서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려는 본능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가운데 두 길이 있다면 그 중에 나에게 더 여렵고 힘든 길을 택하라는 권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 바울처럼 독신의 은사가 있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은사가 없음데도 불구하고 독신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인 것이다.  그러면 독신의 은사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짧은 성경적 지식으로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정욕(혹은 성욕)을 참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면 컨트롤 못한다면 그것은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에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스스로 고자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성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독신으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죄를 범할 위험이 상당히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독신의 은사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먼저 성경적인 지식을 얻기 위하셔 성경책과 더불어 그것에 관한 바른 성경 해석을 한 책들을 사서 보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5년 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