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개역한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브리서 4 12).

 

 

저는 요즘 제 네이버 블로그에 있는 말씀 묵상의 글들을 수정 중에 있습니다.  어느 형제가 저에게 제안한대로 그 말씀 묵상의 글들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편안하게 잘 볼 수 있도록 저는 그 글자 크기를 10 font에서 19 font로 크게 수정하고 있습니다.  제 네이버 블로그에 제가 묵상하고 나눈 말씀 묵상의 글들이 몇 개인가 생각도 안하고 무턱대고 수정 작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시편” 말씀을 수정 중에 있는데 이 설교 준비를 어제 하면서 보니까 말씀 묵상 글들이15,000가 넘더군요. ㅠ ㅎㅎ  그러던 중 어제 월요일 오전에 창만 삼촌 선교사님하고 카카오톡을 주고받았습니다.  어제 삼촌 선교사님은 Los Angeles에 오실 일이 있으시다 하여서 제가 점심 식사를 같이 하려고 했다가 결국 오늘 화요일에 점심 식사하시자고 하셔서 저는 오늘 가정 예배 설교를 오늘 아침에 준비하기보다 어제 월요일 오후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랬을 때 생각난 것은 사랑하는 사촌 동생 수정이가 암투병하고 있었을 때 고백한 5개의 신앙 고백 중 세 번째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고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as I started studying and reading the Bible, His words came alive. I started to understand what it truly meant that Jesus suffered on the cross to give us eternal life. I learned what it means to have joy”).  그리고 저는 이 신앙 고백을 다시금 묵상할 때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개역 한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아마도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수정이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히브리서 4장 12절 개역 한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수정이가 말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과 수정이의 세 번째 신앙 고백과 더불어 제가 어제 수정하고 있었던 시편 119편 말씀과 연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오늘 본문 히브리서 4 12절과 제가 수정하고 있는 시편 말씀 묵상의 글과 연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리할 때 저는 제가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란 제목 아래 묵상한 시편 119편 25-32절 말씀의 글에서 한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침체되고 낙망한 영혼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히4:12).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다가 지쳐 쓰러질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18절인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의 말씀으로 마음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약속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사 계속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언 24장 16절 말씀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실제로 저는 여태까지 신앙 생활을 해오면서 수 없이 넘어졌었는데 그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저를 살아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2021년 12월 21일에 “주님의 말씀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힘을 얻어 다시금 오뚝이처럼 일으킴을 받은 제임스입니다”라는 제목 아래 이러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써서 제 네이버 블로그에 나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되고 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에게 붙어 다녔습니다(사도행전 3:1-11, 현대인의 성경).  앉은뱅이처럼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침체(spiritual depression)되어 있었을 때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주신 오병이어의 약속인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으로 저의 마음을 소생시키시고(이사야 57:15) 저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시편 119:107,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주님의 말씀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힘을 얻어 다시금 오뚝이처럼 일으킴을 받은 저는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그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이끌림을 받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을 “오뚝이 인생”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뚝이”라고 말한 글들 4개만 나눕니다:

 

  • “예를 들어, 저의 경우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제 마음 판에 점진적으로 깊이 적어주시는 주님의 말씀들 중에 하나는 바로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주님께서 강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저에게 들려주신 말씀으로서 성령님이 놀랍고 강력하게 제 마음에 역사하시사 제 마음 판에 적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 약속의 말씀을 1987년 5월에 받은 후부터 쓰러지고 자빠지고 넘어질 때마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낙심한 제 영혼을 오뚝이처럼 다시금 일으켜 주셔서(소생케 해주셔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시편 119편 49절 말씀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현대인의 성경) “주의 종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소서. 주는 나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주님의 가르치심을 신중하게 살피십시다(시편 119편 15-17절)”]. 
  • “오늘 본문 시편 119편 5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어느 누구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위로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곤란 중에서 주님의 위로만을 구하려고 고독의 자리에서 몸 부리 치며 눈물로 통곡하며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를 해주십니다.  저에겐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인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이 제일 큰 위로가 됩니다.  쓰러지고 자빠져 낙심하여 어느 누구도 일으켜 세워주지 못할 때, 또한 어느 누구의 위로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이 저를 살리시고(시119:50) 일으켜 주시므로 말미암아 오늘 날까지 오뚝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살았던 이유는 그 말씀이 그를 살리는 revival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영적부흥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함이 나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나의 소유”(시편 119편 56절)].
  •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잠언 24:16). 그 이유는 우리가 탈진하여 쓰러져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어나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오뚝이와 같습니다. 쓰러졌다가도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사 우뚝 서는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떤 일로 두려움과 낙망 속에서 외로워하며 육신적으로 지쳐 쓰러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육체적 안식과 더불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재충전 받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전심 전력하십시다. 승리!”(“마음이 상한 자” 책).
  •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는 그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 소망되신 주님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인내하며 견디며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희망과 용기로 말미암아 다시금 오뚝이처럼 일어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내일 일은 모르지만 하루하루 소망되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위로와 힘으로 한걸음 한 걸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마음이 상한 자 책” 결론).

 

마지막 두번째로, 저는 오늘 본문 히브리서 4 12절과 수정이의 번째 신앙 고백과 연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수정이의 세 번째 신앙 고백입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고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신앙 고백을 다시금 묵상할 때 수정이는 살아생전에 암투병을 하면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진정 히브리서 4장 12절 개역 한글 말씀처럼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의 마음에 살아 움직였다고 믿습니다.  그랬기에 제가 볼 때 그녀는 두 가지 큰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 두 가지 하나님의 큰 축복이란 이것입니다:

 

  • 수정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수정이는 암과 싸우면서 고통 중에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의 목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육신적으로는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텐데 영적으로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목적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요?  이 이해함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수정이가 암 투병 중에서도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온전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소망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정이는 “I put my trust and hope in Him”(나는 주님께 신뢰와 희망/소망을 두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정이의 이 신앙 고백을 묵상하면서 짧은 2개의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a) ‘내 고통 중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목적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b) ‘고통 중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온전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소망할 것입니다.’

 

  • 수정이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란 그녀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암으로 인해 고통이 극심했을 텐데 수정이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고통이 기쁨과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할아버님께서 암 투병중에서도 저에게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를 불러달라고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저는 그 찬송가의 1절과 5절을 좋아하는데 1절과 2절 가사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가사에 “기쁨”이란 단어가 나오기 때문임: (1절)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2절)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저는 이 가사를 묵상하다가 영어 가사가 궁금해서 읽어보고 이렇게 한국어로 직역을 했습니다: (1절) ‘오, 그분 앞에서 내 영혼이 기쁨을 얻고, 고난 중에 내가 부르짖는 그분, 낮에는 나의 위로, 밤에는 나의 노래, 나의 소망, 나의 구원, 나의 모든 것!’ (2절) ‘사랑하는 목자이시여, 당신은 양들과 함께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랑의 목초지에서 그들을 먹이시려?  죽음의 골짜기에서 왜 나는 슬퍼해야 하며 이 외로운 광야에서 홀로 떠돌아야 합니까?’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수정이에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녀의 기쁨이신 주님을 계시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한 목자되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그녀와 함께 하셨기에 그녀는 슬퍼하기 보다 소망 중에 기뻐했다고 믿습니다[(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그랬기에 수정이는 그녀의 기쁨이신 주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고 믿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신다. 그는 전능한 구원자이시다.  그가 너를 아주 기쁘게 여기시며 너를 말없이 사랑하시고 너 때문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실 것이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수정이의 세 번째 신앙 고백을 다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고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히브리서 4장 12절 개역 한글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마음과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우리도 수정이처럼 느낄 수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