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
(The Pleaser Love Style)
저는 어제 밤에 잠들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하고 제가 쓴 “회피하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The Avoider Love Style)이란 글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아내도 제가 “hyper-independent”(매우/과도하게 독립적)이라는 것과 제가 너무나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는다는 제 말의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제가 아내에게 ‘내가 왜 이러는지 내 자신도 모르겠다’는 제 심정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는 저를 포용해주면서 “It’s okay. God knows”(괜찮아요. 하나님은 아십니다)라고 저에게 말해줬습니다. 저는 아내의 그 한 마디에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록 제가 “HOW WE LOVE”(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이란 책을 읽으면서 5장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The Avoider Love Style”(회피하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에 대한 글이 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 다시금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비춰보고 성찰하면서 글을 적으므로 제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자신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만드신 전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저를 제일 잘 알고 계신다는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 저는 위로와 더불어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어제 아내하고 대화 중에 제가 읽고 있는 “HOW WE LOVE”란 책의 제5장은 “The Avoider Love Style”(회피하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이고 그 장이 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쓴 후 그녀하고 대화를 했지만 저는 그녀에게 그 다음 장인 제6장은 “The Pleaser Love Style”(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랬더니 그녀의 답변은 ‘That’s me’(그게 바로 나입니다)였습니다. 하하. 안 그래도 저는 그 6장을 읽으면서 제 아내가 생각났었는데 아내가 그리 말하니까 저는 그 장을 다시 읽으면서 남편인 저의 입장에서 제 아내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저는 제 아내를 좀 더 알아가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를 사랑하는데 조금이나마 힘쓰길 원하기 때문입니다(이 글도 사랑하는 아내가 읽고 함께 대화하길 기대합니다)(실제로 제가 어제 이 글을 쓰는 것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의 사랑 스타일’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감사한 것은 약 28년 결혼 생활에 제가 아내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아내가 저에게 진솔하게 나눔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 어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많은 불안(a lot of anxiety)을 경험하는데 그 이유는 과보호적인 부모(overprotective parents)가 자녀에 대해 너무나 걱정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p. 73). 또는 화가 많거나 심하게 비판적인 부모도 – 종종 자신도 모르게 – 자녀에게 이런 각인을 심어주는데, 그러면 자녀는 비판이나 분노를 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p. 74). 그 방법이란 그 자녀는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부모를 기쁘게 함으로써 부모나 가족의 긴장을 줄이고 승인(approval)이나 인정(recognition)을 얻으려고 ‘좋은 소년’이나 ‘좋은 소녀’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A youngster adopts the role of the good boy or good girl in an attempt to gain approval or recognition and to reduce tension in the parent or the family by pleasing rather than causing problems”)(p. 74). 저는 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제 아내는 과보호적인 어머님이 너무나 걱정을 하셔서 자라나면서 많은 불안을 경험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제 아내의 말로는 그녀는 어머님에게 칭찬을 받기보다 비판적인 말들을 들으면서 자라났다고 합니다. 제 생각엔 그 이유는 장모님은 제 아내를 너무나/지나치게 사랑하셔서 아내에게 걸었던 기대가 크셔서 그리 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제 아내는 그녀의 어머님에게 승인이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그녀의 어머님에게 승인이나 인정을 받으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순종하는 딸’의 역할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감당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 아내는 많은 긴장을 흡수하고 그녀의 부모님을 행복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의 감정을 알고 책임을 져야 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관계적 스타일을 주도하는 불안을 숙고하거나 처리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These children absorb a lot of tension and try to find relief for their own anxiety by making others happy. Being aware of and responsible for the feelings of others, the pleaser has no opportunity to contemplate or process the anxiety driving his or her own relational style”) (p. 74).
- ‘성인 관계에서 돕는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근본적인 동기는 사람들을 가까이, 만족스럽고 만족스럽게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줄이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면 그들도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화가 나면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도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리를 두거나, 분리되거나, 화가 나면 그 결과 관계에서 공간이 생깁니다. 이 공간은 불안을 유발하고 기쁘게 하려는 사람을 갭을 메우려는 노력으로 추구 모드로 몰아넣습니다. …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이 수년간 만성적인 걱정과 과도한 베풂을 한 후에 종종 원망이 생깁니다’(“In adult relationships, the underlying motivation for being in the helping role and focusing on the needs of others is to reduce one’s own anxiety by keeping people close, content, and satisfied. When those around pleasers are happy, they are happy too. If others are upset, pleasers are distressed as well. When others distance themselves, detach, or are angry, the result is space in the relationship. This space causes agitation and drives the pleaser into pursuit mode in an effort to close the gap. … After pleasers pend a number of years of chronic worry and over giving, resentment often emerges”) (p. 74).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저와 제 아내의 관계를 제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 아내의 입장에서는 제가 행복하면 그녀도 행복하기에 그녀는 저를 기쁘게 하고자 저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므로 저와의 만족스러운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제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볼 때 “hyper-independent”(매우/과도하게 독립적)인 제가 아내가 저랑 함께 하고 싶은 것을 제가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으므로 우리 둘 사이에 공간(space)이 그녀로 하여금 충분히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건강하지 않은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부모는 과잉 사랑하는 자녀를 놓아주고(letting a child to go) 통제권을 포기하는 데(relinquishing control) 어려움을 겪습니다(pp. 74-75). ‘두려움을 느끼는 부모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제권이 필요합니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역동성은 자녀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가르치는 것보다는 부모가 주도권을 잡아서 자신의 불안을 줄이려는 시도에 더 가깝습니다’(“Fearful parents need control in order to minimize risk. In many respects, this dynamic becomes more about the parents’ attempts to reduce their own anxiety by being in charge, rather than about their teaching the child to conquer his or her fears”) (p. 75). 저는 이 글을 읽을 때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부모는 자녀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기에 그러한 자신의 불안을 줄이려고 자녀를 통제(control)하되 심지어 자신의 자녀를 조종(manipulate)까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자녀를 자기 곁에 두든지 자기와 가까이 살게 합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자녀를 돕는데 과도하게 헌신합니다. 그 부모는 자녀가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대로 다 줘서 자녀에게 해로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You can’t do it by yourself; you need my help” (혼자서는 알 수 없어. 너는 내 도움이 필요해) (p. 75). 이렇게 자녀를 믿음으로 놓아주지 못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부모는 자녀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여 실패를 경험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자녀 또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의존적(codependent)t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상호의존적인 관계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가 겪고 있는 관계입니다. 정신 건강이 좋지 않음, 미성숙, 무책임, 성취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관계의 역동성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한쪽 또는 양쪽 당사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삶의 다른 영역을 소홀히 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그들의 극단적인 헌신은 우정, 교육 또는 직업 기회 또는 일상적인 책임과 같은 다른 중요한 관계에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상호 의존적이라고 느끼거나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은 평등하고 양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다른 사람이 번성하도록 격려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나 궁핍에 의존하게 됩니다. … 이것은 개인이나 부부의 성장을 방해하고 독립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위한 공간을 거의 남겨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인터넷)].
- 부모가 만들어 놓은 ‘안전한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자신의 부모에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라도 속박되어 있어서 건강하지 못한 부모와의 관계로 인해 충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정도로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부모는 그들의 자녀에게 끼치는 안 좋은 (나쁜) 영향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순간순간 마다 자녀를 걱정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어떻게 해서든 해소하려고 자녀에게 잔소리하면서 이것저것을 다 참견하는 등 자녀를 숨막히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부모는 여러모로 자녀를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그러한 자녀는 정신적으로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발버둥쳐서 부모님의 보금자리를 육체적으로 떠난다 할지라도(주로 대학교 갈 때 멀리 대학교를 가면서 기숙사로 이주하는 것) 정신적으로 부모님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자녀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부모에게서 받은 많은 나쁜 영향에 이미 길들여져(conditioning)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자신의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정신적으로는 부모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정신적 연결은 건강하지 못하기에 그 자녀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고민과 혼란과 괴로움을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감정적으로도 자녀와 부모가 병든 연결 고리로 매여 있다면 그 자녀는 그 부모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애증). 이러한 매우 심각하고 병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평생 자녀로 하여금 정신적 자유나 감정적 자유 등을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부모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 부모이게 받은 안 좋은(나쁜) 영향의 그늘에 속박이 되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할 위험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부모에게 여러모로 속박되어 있는 자녀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의 남편이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 때 그녀는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p. 83). 실제로 저희 부부의 경우 저는 매우/과도하게 독립적(hyper-independent)이기에 제 아내는 제가 그녀와도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저 혼자 있는 것을 편안해하면 그녀는 충분히 불안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피하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할 수 있지만,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고립되면 실제로 길을 잃고 불안해합니다’ (“While the avoider may prefer to be alone, pleasers actually feel lost and anxious when they’re isolated”) (p. 84). 물론 지금 제 아내는 많이 좋아져서 결혼 초 때처럼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볼 때 아직도 제 아내는 저처럼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기에 어쩌면 제가 자꾸만 혼자 있고 싶어할 때 자신의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쩌면 제 아내는 저랑 이것저것을 더욱더 함께 하고 싶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녀는 자신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결정을 내리려면 일정 수준의 자립심과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거부당하거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려워집니다’(“Making decisions requires a level of self-reliance and self-confidence. Decision making becomes difficult when we are overly concerned about rejection or making others mad”) (p. 84). 이 문구가 저로 하여금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합니다. 지금은 결혼 초보다는 매우 좋아졌지만 아직도 제가 볼 때 그녀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좀 힘들어 합니다. 그만큼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거부당하거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그녀는 다른 사람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사람이 행복해야지 자기도 행복하니까요. 그렇다면 지금도 제 아내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이 저를 기쁘게해서 제가 행복하므로 자기도 행복하려고 한다면 저랑 함께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결정을 저랑 함께 내리고자 대화할 때 얼마나 신경을 쓰겠습니까. 하하. 웃은 일을 아니지만 좀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안 그래도 어제 저희 부부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내가 속해 있는 한인 달리기(마라톤) 그룹에서 12월 중순에 연말 모임이 있는데 아내는 제가 거기에 자기랑 함께 가길 원해서 저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문자로 물어본 후에도 만일 제가 “yes”해서 거기에 가게 되면 제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등등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ㅎㅎ 만일 제가(회피하는 사람인데 ㅎ) 거기 가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아내 외에는) 불편해 하면 아내는 저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아내의 입장에선 충분히 걱정하고 불안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어제 카카오톡으로 저에게 연말 모임 초청장을 보낸 후 ‘가질 말까???’라고 글을 써서 저에게 보냈답니다. ㅎㅎ 결론적으로 어제 식사하면서 아내가 달리기 친구에게 그 연말 모임에서 무엇을 하는지 좀 알아본 후(제가 알기를 원해서)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자고 합의를 보았답니다. ㅎㅎ
- ‘두려움에 사로잡힌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통제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분리되면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의 불안은 심화됩니다’(“Fearful pleasers usually control in passive ways with one purpose in mind: to keep others close to them. When people around them detach emotionally or physically, the pleasers' apprehensions intensify”) (pp. 85-86). 저는 이 문구를 생각할 때 제 아내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으로서(a pleaser) 남편인 저를 가까이 두길 원하는데 저는 회피하는 사람인지라(an avoider) 과도하게 독립적이어서(hyper-independent) 아내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저 혼자 편안하게 있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렇게 저희 부부는 다르답니다. ㅎㅎ. 그런데 저는 이렇게 저희 부부가 다르다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좀 믿음의 눈으로 엿보게 되어서 어제 아내에게 제 생각을 나눴습니다: ‘내 생각엔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를 짝지어 주셔서 부부가 되게 하신 이유는 나 같은 회피하는 사람이 매우/과도하게 독립적이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당신을 믿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당신을 전적으로 지원하게 하시사 당신이 이렇게 나 없이 마음 것 달리기도 하고 남자들하고도 암벽등반도 할 수 있게 되므로 스스로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점점 더 제가 없이도 혼자서 이것저것을 잘합니다. 그 정도로 제 아내는 이젠 더 이상 제가 자신하고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 하나님께서 회피하는 저와 기쁘게 하려는 아내를 부부로 만들어 주신 섭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시도에서 일정이 너무 빡빡해지고 관리하기 어려워지면서 시간 관리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As a result, time management can be a problem as their schedule becomes overcrowded and unmanageable in their attempts to make everyone happy”) (p. 86). 제가 이 문구를 읽으면서 제 아내가 생각난 이유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제 아내는 저희 집 모든 식구를 만족시키려는 시도에 시간 관리를 힘들어 하곤 했습니다. ㅎ 예를 들어, 전에 저희 식구가 무엇인가를 다 같이 하려고 대화를 했었을 때 그녀는 남편인 저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만족시키고 싶어하였기에 시간에 맞춰서 계획을 세워서 실행으로 옮긴다는 것은 아내에게는 부담이 되었고 스트레스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아내는 무엇인가를 시간에 맞춰서 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고 지금도 쉽지는 않아보입니다. ㅎ 그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다 기쁘게 하려고 하다보니 생각이 저절로 많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속전속결을 할 수가 없는 스타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피하는 저는 과도하게 독립적이래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스타일이기에 무엇인가를 결정해서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아내의 입장에서 저를 바라볼 때 시간 관리를 그렇게 쉽게 잘 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고 동시에 자기는 왜 남편처럼 못하는 가 자책하면서 시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자책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부 차이 가운데서 엿보는 하나님의 섭리는 언젠가부터 제 아내는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저와 의논해서 저의 의견을 듣고 나름대로 결정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도 들 받는 것 같습니다. 서로의 단점을 서로의 장점으로 보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점점 더 믿음의 눈으로 엿보게 됩니다.
-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은 주는(베푸는) 것은 좋아하지만 받는 것은 잘 못합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거나 느끼는지 물어보면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은 종종 모릅니다’ (“Pleasers are good givers, but lousy receivers. When asked what they want or feel, pleasers often don’t know”) (p. 86). 저 같은 회피하는 사람은 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제 아내와 같은 사람은 주는 것은 잘하지만 받는 것은 잘 못합니다. 심지어 제 아내는 제가 무엇인가를 줘도 항상 다 받지 않습니다. ㅎ 제 생각엔 사랑은 주는 것뿐만 아니라 겸손히 받는 것도 사랑인데 제 아내는 상대방을 나름대로 많이 고려/배려해서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선물 등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기뻐하지) 저 같은 남편이 나름대로 사랑하고 생각해서 무엇인가를 줘도 제 마음을 잘 받지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아내는 저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제 아내는 받는 데 서툰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좀 아이로니 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제 아내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남편인 저를 많이 배려한다고 생각하면서 남편이 주고 싶은 선물 등을 받는데 서툴므로 결국 저의 마음을 잘 배려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ㅎㅎ
-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두려운 반응에 대해 과도하게 민감한 경향이 있어, 보호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습니다’ (“Pleasers tend to be hyperalert about possible fearful responses from others, so they may overemphasize the need for protection”) (p. 87). 당연히 저는 남편으로서 제 아내를 보호해야 하는데 회피하고 과도하게 독립적인 저는 제 아내의 입장에서 그녀를 잘 보호하지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저는 제 아내가 여러모로 독립적인 사람이요 홀로서기를 잘 하는 여자가 되길 원하기에 제 아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마음 것 하게 지지하는데 저의 사랑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그리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 아내의 입장에서는 저의 반응에 대해 과도하게 민감한 경향이 있으므로 아내가 원하고 필요한 보호를 제가 해주지 못할 때 충분히 서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저는 “hyper-independent”하고(과도하게 독립적이고) 제 아내는 저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hyperalert”(과도하게 민감)하는 것이요. ㅎㅎ 이렇게도 참 많이 다른 두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고 부부가 되게하셔서 서로의 다른 점들을 인식하게 하시는 가운데서 서로의 장점으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케하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엿보게 하실 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걸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