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 자유를 누리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요즘 저희 부부는 한국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Forecasting Love and Weather)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가 결혼 전에 읽었던 책인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Making Peace with Your Past"(저자: H. Norman Wright)]라 생각났습니다(저는 결혼 전에 개인적으로 H. 노만 라이트가 결혼에 관하여쓴 책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음). 아마도 그 이유는 그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 여자가 과거에 10년 동안 연애했고 결혼까지 하려고 했다가 파혼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그와의 과거의 이성 관계에서의 영향이 현재 연애하는 남자 주인공과의 이성 관계에 안 좋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동시에 그 여자 주인공이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도 과거에 그 여자 주인공과의 관계를 깨끗히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관을 갖는 가운데 현재 결혼한 여자와의 관계에 지대한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마음을 먹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과거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좀 더 고민을 하고자 제 개인적인 생각들을 글로나마 적으면서 좀 정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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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붙잡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8장 32절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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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이신 예수님(요한복음 14:6)의 말씀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you forgive your brother from your heart")입니다(마태복음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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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과거에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은 상처가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버지/어머니에게 입은 상처,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입은 상처, 사랑하는 남자 친구/여자 친구에게 입은 상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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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에게 입은 상처, 배우자에게 입은 상처, 자녀에게 입은 상처, 형제, 자매에게 입은 상처, 친척에게 입은 상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한 4 가지로 반응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4 가지를 가리켜 하나님과 춤을 추는 스텝 4 가지라고 말합니다: (a) 하나님과 춤을 추는 첫 번째 스텝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울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인정하기보다 부인(deny)하려고 하던지 무시(ignore)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려고(suppress)하려고 합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을 당할 때마다 원망하며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할 확률이 많습니다. (b) 하나님과 춤을 추기 위한 두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 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우리가 그 원인을 직시하든지 안하든지 할 텐데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할 뿐더러 설상 우리가 그 원인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본능은 그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피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c) 춤의 세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부정하는 데 쏟아 부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가운데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어둡고 무서울 수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터널에 들어가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d) 춤의 마지막 네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의 터널에 들어가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과 상처에 치유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움을 받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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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을 보면 저자 데이빗 A. 씨맨즈(David A. Seamands)라는 전직 인도 선교사님은 “상처 입은 감정”이란 “가장 공통된 감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계속적인 근심을 안고 있고,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가지고 ‘나는 좋지 못해’라고 자신에게 늘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완전주의자 콤플렉스(perfectionist complex)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항상 찾아다니고 항상 애쓰지만 항상 죄의식을 느끼며 꼭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빠져 있게 된다”고 합니다. “또 여기서 지나친 ‘예민감(super sensitivity)’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손상된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은 항상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찬 사람들도 있음. 아마 그 중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심각한 정서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성령 충만하면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해 버리기에 자신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계속 억누르거나 은폐한다. 아니면 자유하지 못한 심령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학대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삶의 밑바닥에 깔리게 되고 나중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신체의 병리적 증세, 우울증, 이상한 행동, 불행한 가정 등을 낳게” 된다고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과거로부터 마음을 옥죄는 상처가 있”으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얽매였던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계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데이빗 A. 씨맨즈라는 전직 인도 선교사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난 감정들) 고치신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6가지로 말했습니다: (1)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2) 어떤 문제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3)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 보라, (4)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성령님께 구하라’(씨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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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관계에서의 상처는 우리에게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까지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성관계에서의 상처란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저는 심각하게 말씀에 조명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모르는게 너무나 많지만 저는 제 마음에 드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가고 싶습니다. (a)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물론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물론 이성관계에서 우리가 상처를 입을 때에는 예수님의 상처가 전혀 생각이 안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생각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그 상처를 입으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상처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이성관계에서의 상처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관계에서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이지 상대방을 "위하여" 혹은 "대신하여"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성관계에서 그러한 상처를 우리가 입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뭔가 차원 높은 이성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b) 두번째로 드는 생각은 "상처 수용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방을 대신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입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또는 성숙한 주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이성관계는 상대방을 위한 또는 대신하여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수용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하여 또는 대신하여 상처를 입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상처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더 나아가 진정으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상처 수용력인지 아니면 우리가 보기에 합당한 상처 수용력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착각 속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c) 세 번째로 드는 생각은 "치유"라는 단어입니다. 입은 상처가 싸매어 지고 치유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를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시편 147편 2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함에 있어서 먼저는 내적으로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시고 그런 후 우리의 외적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특히 그 내적인 부서진 마음(broken-hearted)을 어떻게 치유하시는가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는 이성관계에서의 로맨틱 사랑보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치유하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만이 우리의 이성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마치 더 큰 바닷물이 시냇물을 덮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간의 상처까지도 다 덮일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연애하는 과정에서 헤어짐으로 말미암은 깊고 넓은 상처들, 모든 것이 싫어지고 사람도 싫어지고 결국은 하나님까지 싫어지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포기할찌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절대로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상처입은 사랑하며 존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들 딸인 우리를 더욱더 그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고자 찾으시며 적극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에 내 자신을 마치 요나처럼 던질 때에, 십자가에 벌리신 예수님의 팔에 안길 때에 그의 못자국과 창자국, 상처들을 믿음으로 만지게 될 때에 우리 상처들은 온데간데 없이 치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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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과거로부터 자유를 누린 '상처 입은 치유자'인 요셉에 대해서 좀 생각하고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겐 사랑을 많이 받있지만 10명의 형들에게는 사랑을 받기보다 오히려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할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 죽음의 위기에서도 건져주셔서 결국 그의 나이 17살 때 애굽에 노예로 팔려 애굽 장군 보디발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받아 감옥까지 갇히게 됩니다. 그런 요셉이 과거에만 머물러있었다면 결코 그의 형들을 용서하지 않고(못하고) 앙심을 품고 그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창세기 50:15,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복수하기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을 그가 죽을 때까지(110세) 보살펴줬습니다(20-22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요셉을 그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는 과거로부터 자유를 누리면서(형들을 용서함) 오히려 그의 형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답을 창세기 50장 19절에서 찾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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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셉이 그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을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실은 분명히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은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요셉에게도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요셉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은 그 첫 번째 사실보다 두 번째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요셉은 그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두 번째 사실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사실입니다(20절). 분명히 그의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하였었지만 요셉은 그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실에 파묻혀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형들이 행한 일에 초점을 맞추어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갔습니다. 즉, 형들에 행한 일은 그를 해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앞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어 총리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요셉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의 목적을 알았기에 그는 그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 즉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20절). 이 하나님의 뜻을 요셉을 깨달았기에 그는 진심으로 그를 해하려고 하였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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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들,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 와중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에 우리에게 행한 잘못이나 죄악들만을 생각하면 결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나 죄악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들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데서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즉,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까지 다 돌보겠다는 헌신된 마음으로 간곡히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는 간 곳없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마음으로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수동적으로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형들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는데서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용서는 능동적이었습니다. 오히려 형들의 입장에서 더욱더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형들을 간곡히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형들과 그의 가족 식구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것은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을 다 돌보겠다고 요셉은 약속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두 번째 사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아야 합니다. 비록 상대방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난의 순간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시34:8).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때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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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낙심되고 우울할 때, 염려와 걱정 속에서 허덕일 때에 소망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에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병든 마음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제임스 김, "마음이 상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