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8:1)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2)

내가 겪는 고난 중에 평안을 얻을 방법은 주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화평의 입 맞춤은 비천한 인간과 창조주의 입맞춤이며, 왕과 종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입맞춤과 사귐의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의 입맞춤의 현장이며, 그곳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습니다.(시85:10)

신부는 그의 사랑하는 자가 왕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와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였더라면, 그리고 같은 신분이었더라면 그 사귐에 어떠한 방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나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 비천한 몸을 입고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의 형제로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인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처럼,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며,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2:11)

우리의 화평의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나의 공로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의 화평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어,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으로써만 얻어집니다. 

왕되신 주님과 화평을 이루는 것만이 세상과 화평을 이루는 길입니다. 나는 고난 중에서 스스로의 열심을 찾았지만, 허무와 좌절의 끝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제는 주께 나아왔으니, 주의 자비와 사랑에 기대어 그의 발에 입맞추길 소원합니다.

또한 생각하는 것은, 바울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롬16:16)는 인사를 자주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은 주인과 종이 입맞추듯, 그리스도께서 내게 입맞추듯, 다양한 신분과 상황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 자신을 낮추어 입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한 아버지, 한 믿음, 한 성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심과 같이 내가 교회를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추어 교회의 화평을 이루어가는 가운데, 한 몸된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기를 소원합니다.(엡2:18)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