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5:3)

이슬을 맞은 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신랑을 두고도 여인은 다시 옷을 입기 귀찮고 다시 신을 신기 귀찮아서 일어나기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핑계 많고 게으른 신자의 모습니다.

혼인을 치뤄야 하는데 드레스를 입는 것이 귀찮아서 신랑 앞에 나아가기를 망설이겠습니까, 목욕탕에 불이 났는데 옷을 입기가 귀찮아서 도망하기를 망설이겠습니까, 혹은 여행을 와서 낙원과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질텐데 신발을 신기가 귀찮아서 좁고 불편한 숙소에만 머무르겠습니까.

우리 뒤에는 항상 죄와 사망이 도사리고 있고, 앞에는 은혜와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뒤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뒤돌아 보아 소금 기둥이 되었던 룻의 아내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을 신고 허리띠를 둘러 떠날 채비를 했던 유월절의 백성들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늘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 집을 청소하면서 먼지가 어찌나 빠르게 쌓여가는지에 항상 놀랍니다. 어제 청소했으니 오늘은 쉬어도 되는 것이 아니요, 어제 발을 씻었어도 오늘 다시 씻어야 합니다. 청결은 아무것도 안한 채 머물러서 얻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은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그것을 달려가 붙잡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에게처럼, 문 앞에 그리스도께서 서서 문을 두드려야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내 앞에 있는 말씀의 책을 보고도 지나쳐버린 게으른 성도는, 문 앞에 그리스도께서 서서 문을 두드릴 때에도 귀찮아 망설일 것입니다. 이미 혼인하였고 어제도 만났으니, 오늘은 자는 것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게으른 성도는 결코 평안한 쉼을 얻을 수 없을텐데도 말입니다.

어제 말씀을 읽고 기도한지 24시간이 지났다면, 그리스도를 문 밖에 두고 24시간을 기다리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그를 묵상한지 48시간이 지났다면, 그는 머리에 밤이슬을 가득 맞은 채(아5:2) 48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얻는 성도라면, 그를 만나고 싶고 그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항상 조바심이 나야 할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천국의 문을 눈 앞에 두고도, 뒤돌아 머무느라 밖에서 24시간을 더 기다리고 48시간을 더 기다린 것인데도 말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오늘도 달려가 눈 앞의 은혜와 영광을 굳게 잡는 하루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