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아4:5)

그리스도께서 그 아름다움을 묘사해내려가고 있는 신부의 눈과 머리카락, 이와 입술, 뺨, 가슴 중에서 여인의 가슴은 남성에게는 없는 기관이며, 이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여 균형잡히게 된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가 다를 뿐만 아니라, 여성질환과 남성질환이 있어서 서로의 아픔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체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과 상황도 다르니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욱 힘듭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그 본질이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점점 남성과 여성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사회 구성원 간에도 같은 부류와 계층 간에 어울리길 좋아하며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동질성을 찾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질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구원을 받아야할 가련한 존재라는 것에서 나올 뿐,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고 남자와 여자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릅니다. 하다못해 교회 안에서도 성경은 그 직분과 지체마다 서로 다른 부르심과 역할을 강조합니다.

남성과 여성 간에 신체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서로간의 다름은 ‘실재’합니다. 이러한 서로 다름은 서로 같아지는 동질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동질성이 아니라 서로 다름에 기반합니다.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연합도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비유됩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를 서로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일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 다르나 서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며(갈3:28)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이유도 그 본성은 다르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발휘되는 것이 성도의 여성성입니다. “너는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기뻐하라“(잠5:19) 여인의 가슴은 암탉의 날개와 같이(마23:37)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품을 줄 알며, 그 위로하는 품 안에서 연약한 자에게는 신령한 젖으로 필요를 채워주고 어린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남을 돕습니다.(사66:11, 벧전2:2)

서로 그 본성이 다른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도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무한하심, 불변하심 등과 같은 비공유적 속성이 있는 반면, 사랑의 연합 가운데서 성도가 가질 수 있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 등과 같은 공유적 속성들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 역시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과 사랑 가운데 공유되어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습니다. 예컨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남성 성도만을 향한 명령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할 것 없이 잃어버린 '여성성'을 함께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는 강한 남성이나 군사와 같이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가 선포되도록 해야할 사명이 있지만, 그 방법은 세상을 향한 어머니와 같은 사랑, 아내와 같은 사랑입니다.

다만, 위로하는 품에 안는 여성성을 발휘하는 가운데서도, 동성애 문제와 같이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는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바르게 자라도록 돕는 것도 어머니의 여성성입니다. 성도가 여성의 품과 같이 세상을 품어야 한다 함은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을 하나님의 품안에 불러모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지 구별 없는 포용을 말함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기도하고 행동하는 어머니와 아내들의 역할은 정말 컸습니다. 교회가 성령님을 따라 바른 남성성과 바른 여성성을 회복함으로써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주께 찬양하기를 소망합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