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4:1)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는 늘 우리의 눈을 향하시며, 그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헤아리십니다.

즉, 그는 우리의 눈을 통해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헤아리시니 우리는 그분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보기시기에 우리는 어떠했나요. 하나님의 형상과 질서를 따라 창조된 인간의 아름다움은 한때 탁월하여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1:31)

그러나 죄는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인류는 무질서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상실하였습니다. 온 인류는 이그러진 아담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서(창5:3)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악하였으니 그를 진노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자신에게서 만족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어둔 그늘을 따라 살며(마4:16)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지 못하였고 무질서 가운데서 다른 피조물들로부터도 거부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우리는 반전을 보게 됩니다. 아가서의 4장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의 흠없는 아름다움, 혹은 이 땅에서 거듭나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묘사합니다.

성결해진 신부의 베일 너머의 눈은 순결하고 온유하며, 그의 머릿결은 윤택하고 건강합니다. 

한때는 우리를 실족하게 하여 뽑아 내버리는 것이 차라리 유익이었던 두 눈은(마5:29) 이제는 주를 향한 눈이 되었고(시123:1), 죄가운데서 슬피 울며 뜯었던 머리털은(사22:12)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기운 그 머리털이 되었습니다.(눅7:38) 그리고 우리가 부활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영은 물론이고 모든 육체가 성결 가운데서 아릅답고 흠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문제는 나에게 이러한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십자가에 못박히어 손과 발이 뚫리우고 살이 찢기웠을 때에 비로소, 그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육체가 무덤에서 썩어지고 사라짐 역시 우리가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기 위함이며(빌3:21), 우리의 오늘의 고난과 상함도 주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불 가운데서 하얀 재가 되거나 땅 가운데 분해되어 결국 남겨진 바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부활 가운데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도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강하며 아름답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옛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니 옛것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함이요 우리의 기쁨을 위함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결혼할 수 없으며 사람과 고양이가 결혼할 수 없듯이 본질적으로 주님과 같은 형상을 가져야만 주님의 사랑스런 신부되어 교제하고 화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썩어질 육체와 썩어질 세상에 있지 않고 부활함에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 즉 성도의 사랑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오늘의 하루를 아름답게 할 것이며, 그것 외에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거듭남과 부활을 통하여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