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3:5)

2장 7절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면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제 눈에 비친 부모님의 모습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로워보였습니다. 한 방에 이불을 깔고 함께 잠을 잤었는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무시는 소리, 가령 코를 고시거나 새근대는 소리를 주의깊게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작은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오늘도 내 곁에 계심을 확인하며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심이 행복했고 잠을 자는 시간만은 가난한 자에게도 평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은 평화가 깨어지지 않도록 숨죽인 채, 부모님의 주무시는 소리에 귀기울이곤 했습니다.

반면, 부모님의 잠을 깨울 때도 있었습니다. 햄버거가 먹고 싶은데 사줄 돈이 없어 근심하다 낮잠을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우고자 소위 땡깡을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못주무시도록 지독히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위태로운 세상 속에서 성령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그 생명의 호흡, 그 영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성령님을 요동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반면 불만족하여 지금에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을 시끄럽게 하며 성령님을 요동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엡4:2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성을 좇아(엡4:2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엡4:30) 육체의 소욕으로 인해 성령을 거스르는(갈5:17) 경우가 그러합니다.

물론,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성령님께서는 거듭난 성도의 영혼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이것은 아가서가 쓰여질 당시의 구약 성도들도 누리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교통하심을 오늘 이 시간에도 누리고자 한다면, 그래서 실족하며 넘어지지 않고자 한다면, 성령님을 거스를까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할까 두려워하며 이 평안이 깨어지지 않도록 거룩을 힘써 지켜야만 합니다.

사실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누군가를 기대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살면서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되고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언젠가는 제 곁을 떠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함께하심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저는 여전히 죄를 지어서 성령님을 붙들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떠나갈까 두렵고, 가진 것이 떠나갈까 두려워서, 더욱 더 많은 것을 붙들고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보증으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도 단 하나, 모자람 없는 만족을 주는 것도 단 하나 뿐이니, 바로 그리스도시며 성령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기도와 말씀의 평상 위에 주님과의 이부자리를 펼칩니다. 이 평안이 달아나지 않도록 주님의 영의 세미한 소리에 귀기울이며 이 밤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만이 위태로운 이 세상을 살아내는 저의 방법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주님과 늘 함께 하며 그의 영을 요동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삶도 요동치 아니하며 어둔 밤에도 그의 영혼이 결코 요동치 아니할 것을 믿습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