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3:3)

성중의 행순하는 자, 곧 파수꾼들은 술람미 여인이 찾고 있는 솔로몬왕의 권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파수꾼들은 교회를 지키는 교역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서 마지막날까지 이 세상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우신 일반 일꾼들일 수도 있습니다.

교역자는 물론이고, 정치인이나 과학자, 예술가, 선생님 등 각 영역에 세워진 사람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한 가운데서 이 세상을 파수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도 이 세상을 일시적으로나마 보존하시고 그 뜻을 펼치십니다.

그러나 신자든 불신자든지 각자의 주어진 영역에서 그 소임을 다할 수는 있지만, 세상의 어느 전문가나 권위자에게 하나님을 물어도 그들이 하나님을 찾아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학에서 하나님을 만났느냐, 예술에서 하나님을 만났느냐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할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신자라서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열심히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 사람이 교역자라고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성령님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며, 성령님만이 우리 영혼의 파수꾼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차별없는 일반은총과 일반계시 가운데 자연과 사회 가운데 풀어놓으신 하나님의 흔적을 따라, 그리고 성도를 향한 특별은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남겨둔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아1:8), 우리가 사방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4:8)

또한 그리스도를 찾는 구도자들에게는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네가 그리스도를 보았느냐” 하였을 때, 그리고 “질고 가득했던 인생 가운데서 네가 그리스도를 보았느냐” 하였을 때, 우리는 거침없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안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의 고백처럼, 주님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뵈어서(욥42:5), 마치 모세처럼, 지나온 광야 생활을 회고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지체들에게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까 두렵고, 그리하여 나조차도 다시 찾아가는 길을 모를까 두려우며, 나는 만났다고 하였는데 내가 만난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서,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7:23) 할까 두렵습니다.

오늘도 내 안에 성령님이 파수꾼으로 계셔서 또한 내가 성령님께 묻고 또 물어서, 그리스도께로, 하나님께로 인도되어지길 바랍니다. 오늘도 고단한 내 하루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저는 진정 아무런 소망도 쉼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