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어제는 지하철에 앉아 말씀을 읽던 중,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말 별 것 아닌 문제였습니다. 보일러가 안된다는데, 이미 곧 여름이니 별 문제가 아니었죠. 치매로 편찮으신 어머니는 작은 사건이나 변화에도 많이 두려워하십니다. 이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인지 능력이나 소통 능력이나 작업 능력 등 많은 능력이 떨어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저는 참을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10통 이상 지속된 통화 중, 결국 짜증을 내고 화를 냈습니다. 점차 기억력과 판단력과 운동능력을 상실해가신 아버지를 떠나보낸지 한 달 남짓 되었기에, 어머니와의 통화 속에서 두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돌봐드리지 못하는 죄책감, 조급함, 무력감 등이 엄습해왔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은 언제나 엄습합니다. 저 자신에 대한 일이면 차라리 나을텐데, 가족의 일이라 마음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또한 은혜로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주체 못할 낙심에 빠져들기도 하고, 잘못된 생각과 행실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육체는 그 명을 다할 때까지 그 힘을 점차 잃어가다가 땅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작은 일에도 쉽게 놀라고 두려워 떨며 낙심합니다. 두려움과 조급함, 담답함과 무력감, 죄책감, 또는 끓어오르는 욕망에 휩쓸리는 사이, 사리분별은 더욱 어려워지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잘못된 판단을 내리니, 스스로는 도무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비참합니다. 죄에 유혹되어 죄를 사랑했으나 죄를 발 아래 굴복시켜 다스리지는 못하였으니, 죄에 복종하여 죄의 삯인 사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무거운 짐을 지고서 시름 중에 있습니다.

성도이거나 성도가 아니거나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다만,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알고 자신의 수치를 발견합니다. 또한 세상의 공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수치로부터, 도망가 숨지 않으면 숨이 막혀올 것입니다. 다만,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여 몸을 숨긴 반면, 성도는 비둘기가 낭떠러지 바위 틈에 몸을 숨김 같이, 반석되신 그리스도께 그 연약한 몸을 숨길 것입니다.

저는 어제 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치고 성경을 덮는 대신, 비둘기가 돌아옴 같이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여 낙심하기보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말씀을 끈기있게 붙들어 차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끈질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입니다.(사40:31) 세상은 우리를 향한 공격에 있어서 참으로 끈질기나, 성도는 끈질기게 하나님을 신뢰하여 세상을 이겨낼 것입니다. 성도 안에 여전히 잔존하는 죄성도 끈질기나, 성도는 끈질기게 하나님을 붙들어 죄된 본성을 이겨낼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시간 중에도 성도를 향한 공격은 끊이지 않겠지만, 그것이, 두려워 하나님 품을 떠나갈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께 숨어 그 품 안에서 얼굴을 내밀어 끈질기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에서 그 작은 얼굴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그 사정을 아뢰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아릅답게 보시고 그의 능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약하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출19:4) 

다른 피할 곳은 없습니다. 어제는 실패하였어도, 오늘은 끈질기게 다시 돌아가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끈질기게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끈질기게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것입니다. 약하디 약한 저라도, 끈질기게 품으셔서 언제나 숨을 만한 안식처가 되어주시는 분이 항상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