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2:9)
그리스도께서는 속히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가 그분을 벽 사이에 두고 창문을 통해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육신의 한계라는 벽이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사고와 제한된 언어로는 삼위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날마다 의지하여 거룩을 이루어가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마주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가끔 생각했습니다. 병들어가는 뇌와 희미해져가는 각막 너머로 병상에서 아버지가 바라본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힘들고 지친 아버지의 눈동자와 어눌한 말 이면의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많이 궁금하기도 했고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저는 희미해진 눈동자와 어눌해진 말과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했고, 서로를 사랑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건강하실 때보다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고, 창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보나,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교제하고 기뻐하기에 충분한 지식과 은혜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여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바라보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나 온전하시니,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가 소유한 그리스도 역시 온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경건의 모양을 가졌으나 직장과 가정에서는 경건이 없고, 의롭다 여김을 받았으나 거듭나진 못하고, 거듭났으나 성화되진 못하고, 지성으로는 믿으나 감정과 의지가 따라오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으나 실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있지만 불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며, 우리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밤 하늘의 별처럼, 다 볼 수는 없어도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 밝은 빛과 따스한 햇볕을 공급받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저는 집에 창문 너머의 풍경을 담은 사진 액자를 걸어두기도 했지만, 그 풍경이 살아있지 않아서 특별한 시원함이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 액자처럼, 우리가 편협하게 이해하고 박제해버린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벽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봐야할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시며, 액자가 창문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태양을 찍은 고화질 사진을 걸어두더라도 어둠과 추위를 이길 아무런 빛도, 따스함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창문 너머의 그리스도를 온전히 마주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소망해야 합니다. 어제 신실한 한 지체로부터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시는지 모르겠다는 눈물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베일이 걷혀질 때까지 다 알 수 없으나, 그 베일이 걷히게 되었을 때, 나의 눈물의 이유와 구원의 이유, 그리고 우리를 기쁨으로 춤추게 할 모든 비밀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다 알지못하지만 바로 지금이 은혜의 순간이며 찬송의 순간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