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아2:8)

"네가 만약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흥분으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되겠지!"('어린 왕자' 중에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구약 성도들처럼, 오늘의 성도들은 “참으로 내가 속히 갈 것이다.”(계22:20) 하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본문의 여인처럼 그리스도를 '나의 사랑하는 신랑'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을 믿는 성도라면, 그는 지금부터 이미 행복할 것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는 속히 오실 주님의 약속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하고 화답하며, 하루 종일 주만 바라고(시25:5) 기다리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을 바랄 것입니다.(시130:5)

저는 여전히 그렇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퇴근길에 가져올 성탄절 선물은 기다리지만 정작 아버지를 기다리지는 않는 철부지 아이처럼, 나의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에는 하루 속히 응답되기를 매달리고 재촉도 해보지만,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에 대해서는 재촉해본지 오래며, 크게 기다리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내가 기다리든 안기다리든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어떤 산이나 강물도, 어떤 장애물도 주님의 속히 오심을 막지 못합니다. 아직 내게 시간이 있으니 앞으로도 회개할 기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이미 늦어버릴지 모릅니다. 가족과 이웃을 전도할 시간이 나중에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 동안에 이미 늦게 될지 모르고, 다시 오심을 맞이하기를 머뭇거리고 주님께로 돌이키기를 망설이는 동안에 우리는 이미 늦어버렸을지 모릅니다. 속히 오신다는 것은 실제로도 그 기한이 길지 않거니와,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미루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뉴스를 보면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니, 뉴스가 아니라 나의 삶만 돌아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들은 뉴스의 사건 사고들을 보며, 예언하기에 바쁘고 하나님의 뜻을 풀이하기에 바쁩니다. 저는 그런 예언과 풀이는 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아는 것은 뉴스를 뒤덮고 나의 오늘을 뒤덮고 있는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곧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메순간 주님의 얼굴과 목소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속히 바라보라. 속히 귀 기울이라. 내가 속히 올 것이다 하는데도 우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합니다.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중에는, 문 밖의 작은 소리에도 귀기울이고 창 밖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여, 멀리서도 곧 그를 알아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속히 오심을 믿어서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고 주님께 귀기울이는 성도라면 매일 매순간 주님을 발견하여 그가 갖고 오실 상급에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을 들고 오늘밤 에굽을 찾아오실 여호와를 믿어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포로된 가운데서도 속히 오심을 기다리는 가운데서 이미 자유인의 기쁨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설주에 그리스도의 피를 피를 발라 오늘밤 찾아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반드시 지금부터 기뻐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