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2:7)
전에도 묵상한 바 있는 본문이지만, 오늘은 이 본문을 읽으며 아버지를 잠시 떠올리게 됩니다. 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식 없이 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깊은 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꿈을 꾸고 계실까? 혹여 좋은 꿈이 될까 싶어, 곁에서 찬송가와 말씀을 들려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바랬던 것은, 매일 그리하셨던 것처럼, 언제 주무셨냐는 듯이 꿈에서 깨어 나를 다시 한 번 바라봐주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영원히 깨지 않을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계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하나님의 기쁨이라면, 저는 눈물을 닦고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가족을 비롯하여 소중한 것들과 잠시 이별을 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서,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론 진통과 눈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동행입니다.
본문의 여인도 자신을 그 품에 누인 채 곁에 잠든 왕이 잠에서 깨어, 혹여 자신을 떠날까, 이 행복한 순간이 달아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둬 가지 마소서."(시51:11)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서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개인에게 임한 성령께서 다시 떠날 수도 있었지만, 신약 시대에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혜사로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결코 그들을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성령충만이지만, 외부의 유혹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날마다 올라오는 죄성 때문에, 성령 충만과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방해받곤 합니다. 다른 것을 사랑하며 다른 소중한 것을 함께 붙잡으려는 마음으로는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사랑과 자기만족을 위해 내가사랑했던 것들,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떠나서, 매일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마주한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17:4) 하며 마을을 떠난 산 위에서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무르고자 했습니다.
저 역시 영원히 깨지 않을 교제가 있고 쉼이 있으며, 하나님이 계시고 아버지가 계시는 저 천성, 저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게 맡겨주신 가정과 회사와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면, 이에 기쁨으로 응하여, 매일의 순간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구하며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침상이 다른 것들로 너저분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 영혼이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들로 시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오늘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다른 것들로 인하여 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쉼을 누리다가 저 천국에서 영원한 쉼을 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