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아1:16)

 

우리는 광야를 걷는 나그네와 같았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인생길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침상, 즉 그리스도와의 둘 만의 교제의 자리만은 늘 푸르릅니다.

성도는 목마른 사슴의 갈급함으로 이 푸른 초장을 찾습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면 풍성한 교제가 있는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날 집어삼킬듯이 뒤따라도, 편히 한 발자욱 디딜 곳조차 안보이고, 조만간 짙은 어둠이 날 급습해올 것만 같아도, 그것은 사실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목마른 사슴과 같은 갈급함이 있어 그리스도와의 푸른 침상으로 나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자리, 말씀 묵상의 자리와 같은 물리적인 자리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는(107:35)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마른 영혼을 새롭게 하셔서 그의 침소 삼으시고 푸르른 생명이 넘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내가 밟는 모든 곳이 푸른 초장입니다.

새는 나무 위에, 꽃과 나무는 기름진 땅 위에, 물고기는 바다 위에 거하듯이 모든 피조물은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 하며,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입니다.

풍성한 교제, 푸른 초장, 마르지 않는 샘물, 이런 속편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질고가 있습니다. 버틸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는 누군가가 이러한 묵상을 읽는다면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그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개인적으로 저의 평생에 걸쳐 가장 두려워했던, 아버지의 아픔과 소천, 그리고 여전히 가족에게 남겨진 질고들 가운데서 아가서를 찾기 시작했고 찬송의 기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증언하건대 하나님의 능력은 실제적이며 그리스도와의 침상은 푸르러서, 오늘의 하루를 푸르르게 하십니다.

그가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나의 터전을 벗어난 깊은 산골짜기에서나 발견된다면, 저는 그런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나의 영혼을 푸른 침상 삼으시고 나의 오늘을 둘만의 침상 삼으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가 애통해야할 대상은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 죽음과 이 모든 고통을 인류에게 가져온 ‘죄’의 문제와, 죄로 인한 나의 연약함이고, 우리가 기뻐해야할 대상도 우리의 좀 더 나아진 현실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비로소 나를 왕의 침소로 초청하신, 그리고 나를 침소 삼으신 하나님 그 분이십니다.

 

(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