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가슴)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아1:13)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갈 때엔 당시 규례를 따라, 몰약과 향품으로 열 두달 동안 몸을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에2:12)

그러나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엔 그리스도께서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가 되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여주시고 우리의 향기가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몰약 향낭 되어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입술이나 기분 가운데 좌정하지 않으시고, 우리 품 안의 영혼 깊은 곳에 그의 영으로써 좌정하십니다.

나의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등 모든 것을 주관하는 본성 가운데 작용하셨을 때에야, 우리의 심령은 위로를 얻고 신령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심령이 많이 지치고 상하였을 때, 입에 달콤한 것을 물고, 달콤한 것을 생각하거나, 달콤해져야지 한다고 해서 나의 심령이 달콤해지지는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입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거나 믿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각성이 우리의 본성을 타격하여 우리의 심령이 깨어질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되어 그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고 그리스도의 강력한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심령이 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본성이 죄를 향해 기울어진 자들도 그 입술에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고 그들의 기분에 그리스도를 담을 수는 있지만, 그 심령에는 그리스도를 담지 않아서 여전히 향기로움도, 기쁨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본성의 씨앗을 심으셨을 때에, 이 거룩한 씨앗에서 자라난 ‘성령의 열매’만이, 달콤한 향기를 발하고 우리의 갈증과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모임 중에, “사랑해야 하는데..”, “전도해야 하는데..”, “가정예배해야 하는데..“,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등 많은 고민들이 우리를 질책하고 채찍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가슴 가운데 그리스도를 품은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 그와의 향기로운 교제로 기쁨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기쁨과 향기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가 없어서, 사랑과 전도와 예배로 드러나고 좋은 아버지와 좋은 자녀됨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저 자신에 대한 가장 큰 기도제목은 이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를 묵상하는 것도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이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나의 매일에서 내 품의 향낭과 같은 그리스도가 발견되면 좋겠고 넘치는 기쁨이 발견되면 좋겠습니다. 

천국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면, 반드시 우리 심령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보좌가 우리 가운데 마련되어 있다면, 우리 가운데 천국을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어서 우리 심령에는 기쁨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