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하라”

 

 

 

 

[골로새서 2장 8-23절]

 

 

 

           여러분, “이단”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황대우 교수란 분이 “개혁주의 학술원”이란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단(異端)이란 ‘다를 이’에 ‘끝 단’자로 구성된 단어이며 ‘끝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단을 의미하는 영어 명사 ‘헤러시’(heresy)의 어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하이레시스’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두개파’(행 5:17), ‘바리새파’(행 5:17), ‘파당’(행 26:5; 고전 11:19; 갈 5:20) 등과 같은 ‘분파’를 의미하는 중립적 개념이다.  1세기의 사도들은 일종의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의 속사도교부들은 그 용어를 부정(否定)과 차별(差別)의 의미를 내포한 평가적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이단의 의미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용어는 이미 2세기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개념이다.  영국 신학자 맥그래스(McGrath)에 의하면, “이단은 우발적이든 고의든 주인의 집안에 대안적 신념 체계를 세우는 수단, 즉 일종의 트로이 목마 같은 것이다.  이단은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괴적 씨앗을 심는 신앙의 원수이다. ….”  “오늘날 ‘이단’이란 말은 ‘완전히 다른 복음’, 즉 기독교에 포함시킬 수 없는 단체나 모임에 적용하는 용어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기준, 즉 이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기독교가 아닌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정통 기독교 교리를 부인하거나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대상인 신론과 기독론이 다를 경우, 이것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인터넷).

 

여러분, 사탄의 나라에는 오직 속임수(deception)와 사악함(wickedness)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진리(truth)와 순결(purity)이 있습니다(맥아더).  우리는 속임수로 우리를 유혹하는 자들을 대적해야 합니다(민25:17-18).  시편 기자는 시편 4편 2절에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현대인의 성경) “사람들아, 너희가 언제까지 나를 모욕하려느냐? 너희가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된 것을 추구할 작정이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거짓”이란 ‘속임수’(deception)를 말씀합니다.  시편 3편2절에서 시편 기자 다윗은 많은 대적들은 이미 다윗의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라고 거짓말로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편 4편에서도 다윗의 대적들은 계속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속임수를 써서라도 다윗을 계속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속임수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라는 것으로서 그것은 결국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다’라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자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속임수입니다.  이러한 속임수는 지금도 사탄이 우리에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거짓말의 아버지인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탄의 속임수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속이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말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우리는 너무나 수없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에베소서 4장 14절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8-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1절)에게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8절)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4가지임 (The Outline Bible).  이 4가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영지주의(Gnosticism)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골 2:8-10).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다닐 때 Peter Jones라는 교수님의 과목을 선택한 적이 있었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그 교수님이 쓴 “The Gnostic Empire Strikes Back”이란 책입니다.  한국어로 책 제목을 번역한다면 “영지주의 제국의 반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영지주의”(Gnosticism)이란 이단에 대해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영지주의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그리스어의 ‘신성(theos)’과 ‘지혜(sophia)’가 결합된 용어로 ‘신성한 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과 우주와 인간에 대한 신성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면 다 신지학이라 할 수 있다”(인터넷)],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혼합형태로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에 초대교회와 경쟁했던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습니다(인터넷).  “영지주의가 일어났던 때는 사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영지주의 이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습니다(인터넷).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Clement, 150-215)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는 인물이다.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장 9-13절에서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과 동일 인물이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재주를 부렸고, 많은 인기를 얻자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신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들었다.  시몬은 자신이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인터넷).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인터넷).

 

          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교리에 대해 한 2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영지주의의 영육이원론(dualism)입니다.  이 거짓된 이론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선하지만 물질과 육신 혹은 몸이 악하다고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성경은 결코 영육이원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바 영혼과 몸과 물질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물질이나 몸이 본래적으로 악하다는 관점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인터넷).  이 영육이원론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로서 일체의 육식과 결혼을 금할 뿐만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로 육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윤리적 방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인터넷).  (2) 영지주의는 구원은 영적 깨달음에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구원은 영적 지식의 각성에 의해 이뤄진다.  영적인 인간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각성에 이르게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영적 각성은 영적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영지를 중시한다”(인터넷).  “영지, 영적 비밀에 대한 지식을 중시한 것이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지성적이며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지식, 신적인 것에 참여함으로 얻는 영적인 지식을 말한다.  합일의 지식이며 구원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성취하는 자기인식(깨달음)의 행위이다”(인터넷).  “영지주의에 따르면(지방교회와 구원파가 영지주의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행함이 아니라 참 지식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윤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에서의 해방과 양심의 해방을 강조한다.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밀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인터넷).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에게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권면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람의 가르침이나 이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에 근거한 것이지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를 사로 잡을까”라는 말씀은 그 당시 초대 교회 때 거짓 선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 성도들에게서 진리와 구원과 축복을 앗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맥아더).  그리고 “철학”[문자적 의미는 ‘지혜를 사랑’(love of wisdom)]이란 단어는 하나님이나 세계(이 세상이)나 또는 삶의 의미에 대한 모든 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그 당시 초대 교회 때 골로새 이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이 얻었다고 주장하는 더 높은 지식(higher knowledge)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했습니다(맥아더).  여기서 골로새 이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었다고 주장하는 ‘더 높은 지식’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이 영지주의 이단에 빠진 사람들임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골로새 이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었다고 주장하는 더 높은 지식을 설명하는 거짓 선생들의 “철학”(philosophy)을 “헛된 속임수”(empty deceit)와 동일시했습니다(맥아더).  그 당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던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근거하여 몸을 악하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은 단지 영일뿐이라고 주장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했습니다(8절).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신의 충만함이 물질 세계를 마지막으로 창조한 많은 천사 존재들 사이에서 나누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The Gnostics thought the fullness of God had been divided among a number of angelic beings, the last creating the material world)(The Nelson Study Bible 주석).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형태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9절).  9절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신적 성품이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신적 성품이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습니다”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이라는 의미입니다(KJV 주석).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The Nelson Study Bible 주석).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서 골로새 이단(영지주의 이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었다고 주장하는 ‘더 높은 지식’을 “거짓된 지식”이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말을 “망령되고 헛된 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21절).  디모데전서 6장 20-21절 말씀입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현대인의 성경) “디모데여.  그대는 맡은 일을 잘 실천하시오.  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모독적인 무가치한 잡담과 변론을 피하시오.  이런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더 높은 지식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때의 영지주의 이단이 지금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초기 교회가 영지주의 이단에서 직면한 많은 것들이 오늘날 “New Age movement”(뉴 에이지 운동)라는 새 이름으로 교회를 괴롭히고 있다고 Peter Jones 교수님은 그의 책 “The Gnostic Empire Strikes Back”(영지주의 제국의 반격)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Peter Jones 교수님은 그의 책에서 뉴 에이지 운동이 어떻게 세상과 교회를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재방문하는 오래된 영지주의 이단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스 자신은 뉴 에이지의 정의를 "고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미끄러운 뱀장어"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자유, 평등, 다양성, 영성, 책임 있는 생태학 및 국제 평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판매 방법(soft-sell) 촉진으로 성공적으로 위장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종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영성"이라는 문구를 선택하여 특별히 "종교" 신문이 허용되지 않는 공공 도서관의 무료 문학 저장소로 만듭니다.  관용과 다양성에 대한 주장으로 전 세계 비밀 종교 네트워크의 실제 의제를 가립니다’(인터넷).  존스는 우주론(Cosmology), 구속론(Redemption), 기독론(Chritology), 성생활(sexuality) 영역에서 뉴 에이지(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도와주는데 구속론만 예를 들고 싶습니다: ‘영지주의 그리스도는 그의 대속 속죄로 죄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신의 신성과 잠재력에 대한 지식인 "그노시스"의 계시자(a revealer of “gnosis”)로 오십니다.  …  영지주의 가르침과 뉴 에이지에서 여성 원리는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구세주 여신이 중심입니다(Goddess savior is central).  앤 프리마베시는 그녀의 저서 “From Apocalypse to Genesis”(묵시록에서 창세기까지)에서 창세기에 대한 재평가를 제공합니다.  그녀는 "이브의 이야기"는 인류의 "타락"이 아니라 성숙의 도래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뱀이 무력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규칙을 지키는 문제를 폭로했기 때문에 인류에게 제공되는 지혜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인 프란시스 왓슨 역시 뱀을 해방자로, 이브를 용감하게 지혜를 추구하는 여주인공으로, 주 하나님을 자신의 특권을 보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질투심 많은 폭군으로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인터넷). 

 

여러분, 이렇게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하는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 이단 사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견고히 서 있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8절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이것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람의 가르침이나 이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에 근거한 것이지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진리를 확고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20절에서 말씀했듯이 우리는 이미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이 세상의 초보적 원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현대인의 성경)]는 사실을 알고(믿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0장 4-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의 요새라도 파괴할 수 있는 하나님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무기로 우리는 여러 가지 헛된 이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사상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로 여러 가지 헛된 이론과 하나님의 대한 지식을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사랑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Legalism)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골2:11-17).

 

전에 제가 읽었던 책들 중에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타비티 얀야빌리 라는 사람은 "복음의 자유, 복음의 열매를 추구하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글을 쓴 것을 제가 읽고 도전을 받았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분열시킨다.  거짓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율법주의와 비난의 영과 독선적인 판단 주위가 들어온다.  뒤이어 다툼이 일어나고 교만이 자리를 뜬다.  율법주의는 교회를 교만한 비난과 도발과 질투로 서로 물어뜯는 영적 사육제로 바꾼다"(얀야빌리).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왜 교회 안에 교만한 비난과 독선적인 판단 주위(주된 자리)가 있으므로 결국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이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바로 율법주의 때문이란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율법주의(Legalism)란 무엇입니까?  주로 우리가 율법주의 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외식했던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며 율법주의란 그들처럼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행위중심 구원관).  제일 근본적인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바로 구약의 율법을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기초한 신앙임.  그래서 율법주의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인터넷).  그러나 이 자기 의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신앙에는 2 가지 위험한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인 죄책감입니다.  율법에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남들보다 잘 지키는 사람들은 영적 우월감을 가지므로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반면에 잘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상습적인 죄책감을 가집니다(인터넷).  우리는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영적 우월감을 갖게 만드는 율법주의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율법주의를 경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 우리는 동일하게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함.  이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가리켜 “반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팀 켈리(Tim Keller) 목사님은 그의 저서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2 가지 오류가 바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율법주의’란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율법주의’에 걸린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면서 ‘반율법주의’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잘못된 대적들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을 엄하고 두려운 분으로 오해한다.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오해한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한다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금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만 하라잖아”라고 말한다.  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것이 있고 금지한 한 가지가 있지만 하와의 눈에는 오로지 금지 명령만 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복을 주는 ‘율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두 가지 길을 추구한다.  한 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이고(반율법주의) 또 한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이다(율법주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골로새서 1장 15-23절 말씀 중심으로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마십시다!” (2)란 제목 아래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던 그 당시 이단 사상들 3가지 중 두 번째가 바로 ‘유대교적 율법주의’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유대교적 율법주의’란 특히 육체의 할례와 음식의 규례와 특별한 절기의 준수가 구원과 관계있다고 주장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1절)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매월 초하루나 안식일에 관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Legalism)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 율법주의를 주의할 뿐만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1-1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3가지로 말씀했습니다(The Outline Bible주석):

 

  •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12절 말씀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사람의 손으로 베푼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육적인 죄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 묻혔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할례”(11절)로 거듭났다(새생명을 얻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할례”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할 필요성을 상징했으며(참조, 신 10:16; 30:6; 렘 4:4; 9:26; 행 7:51; 롬 2:29)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는 죄의 깨끗함의 외적 표징이었습니다(롬4:1; 빌3:3).  신자들은 구원받을 때 ‘육체의 죄의 몸을 벗어 버리는 영적 “할례”를 받습니다(참조: 롬6:6; 고후5:17, 빌3:3, 딛3:5).  이것이 바로 거듭남(the new birth), 회심의 새로운 창조(the new creation in conversion)입니다.  이미 성취된 내적 변화에 대한 외적 확증은 이제 신자의 물세례입니다(행 2:38)(맥아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옛 생명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에 대한 부활의 경험을 상징합니다(롬 6:3-5).  세례는 내적 경험의 외적 표현입니다’(KJV 성경 주석).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면 세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요 1:12-13) 거듭남을 경험합니다’(KJV 성경 주석).  “’거듭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탄생, 즉 거듭남은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고후 5: 17; 딛 3: 5; 벧전 1: 3; 요일 2: 29; 3: 9; 4: 7; 5: 1-4, 18).  요한복음 1장 12, 13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로도 나타납니다(인터넷).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듭남(중생)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젠 새 생명(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므로 율법주의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 말씀입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현대인의 성경)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할례받지 못한 육적인 욕망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할례”(11절)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엡2:12)과 육신(롬8:8)과 마귀(요일5:19)라는 죄의 영역에 묶여 있어서 영적인 자극에 반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즉, 우리는 영적인 삶과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습니다(맥아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현대인의 성경)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골2:13, 현대인의 성경).  에베소서 2장 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골2:13).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죄의 자유(롬3:24)와 완전한(롬5:20; 엡1:7) 용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맥아더).  골로새서 1장 1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아들이 피 흘린 댓가로 자유를 얻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시편 32편 1절 말씀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현대인의 성경)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주신 사람은 행복하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므로 율법주의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대한 혐의(charges against us)를 도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 불리한 율법의 채무증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대한 혐의(charges against us)를 도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대한 혐의를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 불리한 율법의 채무증서”]라고 말씀했는데(14절) 여기서 “증서”(handwriting)란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인정하는 자필 채무 증명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롬 3:23)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으며(갈 3:10; 약 2:10; 참조, 마 18:23-27), 따라서 사형선고 아래 있습니다(롬 6:23).  바울은 신자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양피지의 잉크를 닦아내는 것에 생생하게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우리의 빚 증서를 완전히 지우시고 우리의 죄 사함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신자들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그들 모두를 대신하여 형벌을 지불하셨고, 이로써 완전한 형벌을 요구하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습니다’(맥아더).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대한 혐의(charges against us)를 도말하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므로 율법주의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The liberty in Christ)가 있기에 성도들은 2 가지에 대해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The Outline Bible 주석):

 

  • 사도 바울은 음식(diet)의 문제에 관하여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  …”[(으)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즉, 우리는 아무도 다른 신자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은 날(days)의 문제에 관하여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즉, 우리는 어떤 거룩한 날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신자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에게 이 2가지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자유를 쓸데없고 사람이 만든 율법주의적인 규칙과 바꾸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참조, 갈 5:1)(맥아더).  갈라디이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으니 여러분은 굳게 서서 다시는 종 노릇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매우 경계해야 합닙다.  우리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으로 인해 맺은 위험한 열매인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인 죄책감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율법주의를 주의할 뿐만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넓게, 많이, 높게 깨달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골2:1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셨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대한 혐의(charges against us)를 도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The liberty in Christ)가 있기에 음식(diet)의 문제나 날(days)의 문제에 관하여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16절).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 노릇 하지 말아야 합니다(갈5:1, 현대인의 성경).

 

셋째로, 사도 바울은 신비주의(Mysticism)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골2:18-19).

 

신비주의란 무엇입니까?  “신비(Mystik, 그리스어로는 myein. '눈과 귀와 입을 닫는다'는 의미)라는 어휘는 종교적인 근원현상을 가리키며, 절대자, 무제한자, 신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접촉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인터넷).  “14세기에 꽃을 피운 신비주의는 지금까지도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혼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개인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는 무엇보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 수준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Peter A. Lillback).  “신비주의란 절대자(신)와의 합일이나 연합을 경험하고 황홀경의 경지에 이름을 말한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이성이나 감각을 초월하여 직접적인 직관을 통해 성취하는 체험이다.  신비주의에는 종교마다 수련법이 있는데 (1) 정심, (2) 금욕, (3) 명상, (4) 요가, (5) 자극법(염불, 송주, 타령), (6) 보행, (7) 심상법, (8) 기도 등의 방법이 있다”(인터넷).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8절을 보면 사도 바울 시대 때 신비주의는 신이 2 가지 방법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2 가지 방법이란 (1) 천사 숭배를 통해(2:18a)서와 (2) 환상을 통해(2:18b)서였습니다(The Outline성경 주석).  골로새서 2장 18절 말씀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현대인의 성경) “일부러 겸손한 체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환상을 과장하며 헛된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현세적 축복이나 영원한 상급(참조, 요이 1:8 )을 속이는 거짓 선생들을 허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거짓 선생들(the false teachers)이 그것을 크게 기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꾸며낸 겸손”(false humility)은 사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교만이었습니다(잠 6:16, 17).  또한 그들의 “천사 숭배”는 골로새 주변 지역을 수백 년 이상 괴롭힌 이단의 시작으로서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는 행위였습니다(마4:10; 계19:10; 22:8, 9)(맥아더).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이 높고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구실로 천사 숭배를 주장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 대신에 천사나 성자들을 중재자로 삼았습니다(Word Pictures in NT 주석).  사실상 모든 이단 및 거짓 종교와 마찬가지로 골로새 거짓 선생들은 그들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상과 계시에 근거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헛된 생각”(골2:18, 현대인의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그 헛된 생각이란 중생하지 않은 마음(unregenerated mind)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참고: 엡4:17-19).  이 중생하지 않은 마음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교만한 마음(고전4:6, 18)으로서 그들의 헛된 지식이 그들을 교만하게 한 것입니다(8:1).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3, 4절) 계시(히 1:1, 2)이기 때문입니다(맥아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9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9절 말씀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 몸은 이 머리를 통해 각 마디와 힘줄로 서로 연결되어 영양 공급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비록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에 빠진 거짓 선생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지만(그리스도에 붙어 있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었습니다(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었음).  뿐만 아니라 바울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몸(교회)는 각 마디와 힘줄로 서로 연결되어 영양 공급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19절).  ‘진정한 영성(True spirituality)은 법(laws)(그림자에 불과함)(17절)을 준수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Life)(실체이신 그리스도)(17절, 현대인의 성경)과의 연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생생한 연결이 없이는 자랄 수 없습니다’(The Bible Knowledge 주석).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현세적 축복이나 영원한 상급을 속이는 거짓 선생들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나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Asceticism)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골 2:20-23).

 

래리 오스본 목사가 쓴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는, 크리스천들의 열정적인 신앙에도 함정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주의식 열정에 난색을 보입니다.  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의도하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쉽게 판단하는 ‘신실한 크리스천’들을 “우연한 바리새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오스본 목사는 ‘우연한 바리새인’들은 헌신과 신학적 성숙, 열의, 재정적 헌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이들의 복음에는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다고 꼬집는다.  어떻게 보면 ‘우연한 바리새인’(accidental pharisees)들은 종교적 열광주의와 금욕주의에 빠져 있다고 강조한다”(인터넷). 

 

여러분, 금욕주의란 무엇입니까?  ‘옥스포드 기독교 사전’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는 ‘금욕주의’(asceticism)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음: “금욕주의는 여러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절제를 위한 수단으로, 악에 대항하며 선을 고양하기[높이 쳐들어 올리기(Naver 사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수행 체계를 뜻한다”(인터넷).  위키백과는 “금욕주의는 정신에 속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며, 육체에 속하는 본능이나 욕구를 악의 근원, 또는 악 그 자체로 보는 견해에 바탕을 두어 육체적인 욕구. 본능을 되도록 억제하는 것이 도덕에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관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21-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과 라오디게아의 성도들과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1절, 현대인의 성경)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금욕주의”(asceticism)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금욕주의란 육체를 벌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합니다(Asceticism teaches that one can purify the spirit by punishing the body)(The Outline 성경).  골로새서 2장 21-23절 말씀입니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이 구절들은 엄격한 자기 태만(self-neglect)(23절), 자기 부인(self-denial)(21절), 심지어 자기 학대(self-infliction)를 통해 거룩함을 성취하려는 시도인 금욕주의의 무익함을 지적합니다(맥아더).  이러한 금욕주의는 일시적인 "사용하면 없어질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죄를 억제하거나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무력합니다.  너무나 자주, 금욕주의자들은 그들의 거룩함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려고만 합니다(맥아더).

 

마태복음 6장 16-1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너희는 금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짓는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그러나 너는 금식할 때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보이지 않는데 계시는 너의 아버지에게만 보여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규정들은 제멋대로 만든 종교적 숭배나 거짓된 겸손이나 자기 몸을 괴롭히는 데는 지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체의 정욕을 막는 데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2:23,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은 사람의 계명과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고(22절, 현대인의 성경) 이미 그리스도 함께 죽은 성도들은 이러한 율법적 규정에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20절,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여 세상의 모든 어리석음에서 새 생명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맥아더).

 

여러분,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참되이 받은 바 되어 그 생활에 변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약1:13, 벧전 1:23).  그리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삽니다(박윤선).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참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것이 아닌(8절, 현대인의 성경) 그저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든 계명이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자기 몸을 학대하는(22-23절, 현대인의 성경) 금욕주의적인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를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1) 오히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헛된 높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나, (2) 하나님의 의보다 사람의 의를 추구하고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종 노릇하게 만드는 율법주의나, (3) 천사 숭배나 환상을 통한 특별한 체험으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신비주의나 (4) 자신의 육체를 벌함으로써 정신을 정화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금욕주의를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람의 가르침이나 이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에 근거한 것이지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계명과 가르침에 근거한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분의 복음에 사로잡히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8월 20일, 우리 모두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를 경계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