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목적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확고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위로도 받게 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7절).
이번 주 화요일 저의 가정 예배 때 “나무는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욥기 14장 7-9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었습니다.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며 이 길고 지친 밤을 외롭게 보내야만" 했던 욥(욥7:3, 현대인의 성경), 그의 "피부는 전신에 구더기와 부스럼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의 "살은 곪아 터지고 있"었을 때(5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희망이 없이" 세월 보내고 있었고(6절) 자기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7절).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괴로움과 자신의 영혼의 슬픔을 하나님께 털어놓았는데(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이런 몸으로 삶을 계속하느니보다 차라리 숨이 막혀 죽기를 원"했고 "이젠 사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그는 "내 삶은 무의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15-16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욥은 "잠시라도 품꾼과 같은 고달픈 삶을 쉬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14:6,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욥은 희망이 없이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7:6). 그런데 욥은 "나무는 희망이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14:7). 그 이유는 나무는 “찍혀도 다시 움이 트고 싹이 나서 연한 가지를 내며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고 줄기가 땅에서 죽을지라도 물기만 있으면 다시 움이 돋고 싹이 나서 새로 심은 묘목처럼” 되기 때문입니다(7-9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욥처럼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 것일까요? 욥은 욥기 14장 1-3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 또한 욥은 욥기 7장 17-20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아침마다 살피시며 매순간마다 시험하십니까? 주께서는 어째서 잠시 동안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까? 사람을 살피시는 주여, ….” 욥기 14장 16-1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때는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셔도 내 죄는 들추어 내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며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 우리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가지 끊어”진(8절) 정도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자기들 자신이 “사형 선고받은 줄 알”고(9절) 있는 지체들을 우리가 무엇이관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고린도후서 1장 8-9절 말씀을 문자로 보내온 사랑하는 암 투병중에 있는 사촌 여동생을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다섯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하나님께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부르짖는 그 사촌 여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저는 그 동생과 그녀의 언니, 동생 등, 가정을 낙심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조차도 사용하시사 그 자매를 “능히”(4절) 위로케 하실 수 있으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그 동생과 작은 고모님의 식구를 위로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계속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온 친척 식구들이 작은 고모님 댁에 모여서 가족 예배를 드릴 때에 저는 그 사촌 여동생에게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말한 고백인 “My Father and my Salvation”(나의 아버지, 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그녀와 대화하든 문자를 주고받을 때 그녀의 아버지요 그녀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했습니다. 제 친 할아버님이 암 투병중에 계실 때 저에게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신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제 친 할아버님이 생각납니다.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주일 오전에 찾아 뵙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기도했을 때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셨던 할아버님의 눈가에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기쁨되시고 소망되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신 줄 믿기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암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특히 제 주위에는 정신질환으로 자살충동 뿐만 시도하는 젊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고통 중에 있는 젊은 지체들의 입장에서는 힘에 겹도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심정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귀한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되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사도 바울도 위로하셨다면 충분히 그 형제, 자매들도 위로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혹시나 이 말씀 묵상의 글을 읽고 있는 지체들 중에 바울과 같이 또한 여러 지체들과 같이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정이시라면 시편 43편 5절 말씀을 드립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현대인의 성경) “내 영혼아, 어째서 네가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네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라. 나는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참고: 43: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