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현대인의 성경) “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며 그의 조상 다윗을 본받아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역대하 34장 2절).

 

 

여러분, 우리가 ‘저 사람은 한결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에 ‘한결같다’라는 말에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이 같다”는 말입니다(인터넷).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성경은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심지가 견고한 자”(whose mind is steadfast)를 가리킵니다(개역개정).  그리고 심지가 견고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합니다(4절).

 

오늘 본문 역대하 34장 2절을 보면 유다 16대 왕(B.C. 640-609)(왕하21:25-26)이었던 요시야 왕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며 그의 조상 다윗을 본받아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개역개정)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성경은 요시야 왕에 대해 “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성경은 요시야 왕은 그의 나이 8살 때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을 31년을 통치하면서(1절) “그의 조상 다윗을 본받아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개역개정 성경으로 말한다면, 요시야 왕은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 중 하나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저로 하여금 걷게 하여 주시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주님 걸어가신 그 한 길만 쭉 걸어가게 하여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사 시절 때 즐겨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주님 가신 길”이란 찬양이 있습니다.  1절 가사입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길 거친 언덕 길 지치신 주님의 음성.”  그 당시 이 찬양을 기타를 치면서 종종 부르면서 성령님께서 제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사 저로 하여금 결심케 하시고 각오케 하시며 헌신케 하신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저 또한 걷길 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비록 그 십자가의 길이 찬양 가사처럼 “외롭고 무거웠던 길”이요 “골고다의 길 거친 언덕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기에 진정 제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길을 마땅히 걸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약 30여년의 저의 신앙의 길을 뒤돌아보면 뭣도 모르면서 전도사 시절 때 “주님 가신 길”이란 복음성가를 열심히, 힘차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깨닫게 하시는 것은 주님 가신 길은 결코 나 홀로 걸을 수 없고 오직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이 저와 함께 걸어가 주셔야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주님 가신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는 말은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public ministry) 때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가지시고자 “한적한 곳”(막1:35, 45; 6:32; 눅4:42; 5:16)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제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선 저만의 조용한 장소(quiet place)에서 조용한 시간(quiet time)에 조용한 마음(quiet heart)을 가지고 주님과 일 대일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말한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여기서 외로움과 고독의 다른 점은 외로움은 우리가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가 아닌 도시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낌니다.  이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군중 속에서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우리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의 외로움을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 가운데 있다는 것이라 생각함.  즉,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화하는 기도하는 시간대신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더 좋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사람의 음성을 듣기를 더 좋아하며 스스로 홀로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전화기나 인터넷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에 고독을 즐기지 못하면서 외로움은 너무나도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좀 외로움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이 조용한 마음으로 홀로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경험하므로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광야의 영성”(Desert spirituality)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광야의 영성에 대해서 제 개인적인 생각들을 한 4 가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 저는 광야는 정화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 사역이나 교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가정과 교회를 광야로 삼고 있음.  제가 그리하는 이유는 광야만큼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들춰 내시는 좋은 장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세아 2장 14 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꾀어내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부드러운 말로 잘 타이르고”[(개역개정)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I will lead her into the desert and speak tenderly to her”(NIV)].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바알을 함께 섬기고 있었을 때 그들을 사랑으로 징계하심에 있어서 그들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돈(재물)을 겸하여 섬기므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을 때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부드러운 말씀으로 우리를 타이르십니다.  신명기 8장 2-3절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현대인의 성경) “…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목적 중 하나가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정과 교회를 광야로 삼고 가정 사역과 목회를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욱더 붙잡게 하고 계십니다.

 

  • 저는 광야는 우리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님뿐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들춰내실 때에 저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배로운 피의 능력을 믿고 의지케 하시므로 회개의 은총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 저는 광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 속에 하나님의 마음은 나타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마음(신8:2)이요 (2) 참고 또 참으시는 인내의 마음(참고: 딤전1:16)이요 (3) 용서하는 마음이요 (4) 신실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광야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서 그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느끼며 배워가는 좋은 장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역대하 34장 2절에 나오는 요시야 왕은 그의 조상 다윗을 본받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요시야 왕은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다는 말씀입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행한 옳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왕이 된지 8년에(즉 그의 나이 16살 때에) 그의 조상 다윗 왕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으며 4년 후인 그의 나이 20살 때 왕은 14년 동안이나(그의 나이 34살 때까지) 죄로 더럽혀진 유다와 예루살렘을 깨끗이 하는 정결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산당과 아세라 여신상과 그 밖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3-8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제가 죽을 때까지 죄로 더럽혀진 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하는 정결 작업을 하다가 주님의 품 안에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14년 동안이나 죄로 더럽혀진 유다 땅과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하는 정결 작업을 했던 요시야 왕은 그 정결 작업을 마치고 난 후 유다 왕들이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 둔 성전 건물들을 성전에 들어온 헌금으로 수리하게 했습니다(8-11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성전 건축보다 성전의 정결 작업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여기서 성전의 정결 작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고린도전서 3:16)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 작업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참고: 히9:22).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 건물들을 수리하는 가운데 대제사장 힐기야가 “모세를 통해 주신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는데(대하34:14-15, 현대인의 성경) 서기관 사반은 그 책을 요시야 왕에게 가지고 가서 왕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16-18절, 현대인의 성경).  요시야 왕은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자 두려워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기 옷을 찢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19, 26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참고: 역대하 34:26, 현대인의 성경).  저는 제 평생에 이러한 회개의 통곡 기도를 딱 한 번 드려본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러한 회개의 통곡 기도를 드리게 해 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시야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지도자들을 불러모으자 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왕은 성전에서 발견한 그 율법책을 모든 백성들에게 전부 읽어 주고 성전 기둥 곁에 서서 여호와께 순종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그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법과 명령을 지키겠다고 여호와께 엄숙히 서약하였”습니다(29-31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일)가운데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엄숙히 서약하고 실행에 옮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임.  이러한 옳은 일을 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요시야 왕을 묵상할 때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시119:76, 현대인의 성경).  이사야 54장 1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움직여 없어질지라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시130:7,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주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죄사함)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만족하는 우리는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평생 기쁨으로 노래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대상16:41; 시90:14,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 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미가6:8, 현대인의 성경).

 

 

 

 

“오 신실 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새 찬송가 39장, “오 신실하신 주” 1절 가사),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6월 3일,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새 찬송가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1절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