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이사야 53장 1-5절]

 

 

  1. S. 루이스가 쓴 “The Problem of Pain”(고통의 문제)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고통의 문제를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육체의 고통, (2) 마음의 고통, (3) 정신의 고통, (4) 영혼의 고통.  그리고 저는 제 주위에 지금 육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특히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저는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정신의 고통을 생각할 때 특히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정신의 고통에서 하루 속히 건져 주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저는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저는 영혼의 고통을 생각할 때 특히 시편 22편 1절 말씀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마27:46).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거절당하였거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갖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어느 누구의 위로도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참고: 시77:2).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고통을 겪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고통을 유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 38장 1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주는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기서 히스기야 왕에게 임하였던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임박한 죽음이었습니다.  이사야38장1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고통”을 히스기야 왕에게 주신 것일까요?  그 목적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7절).  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큰 고통”을 겪을 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좀 더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큰 고통”을 통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어떻게 “평안”을 주셨는지 그 대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모든 죄”를 “큰 고통”을 통하여 결국은 회개 기도케 하시므로 말미암아(2-3, 5절) 그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시고[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현대인의 성경)]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17절).  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에게 “큰 고통”을 통하여 (회개) 기도케 하시므로 평안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영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7절).

 

저는 오늘 성금요일을 맞이하여 이사야 53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깨달음과 교훈을 겸손히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53장 2절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현대인의 성경)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외모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보는 것은 외모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조차도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외모인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고(삼상16:7) 마음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데 이렇게 우리는 사람들의 외모를 봅니다.  지금 우리 모두 다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화려하게 꾸민 “겉모양만”]를 보고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벧전3:3).  특히 요즘 같이 다들 예뻐 보이려고 성형수술이 난무한 시대에 값진 명품 옷과 명품 보석 장식, 명품 가방 등등으로 장식하고 걸어가는 미모의 여인을 바라볼 때 세상 사람들은 ‘야, 저 여자 예쁘다’라고 생각하면서 매력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세상적인 아름다움에 현혹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은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한 것인데(벧전3:4)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내적 아름다움(inner beauty)보다 외모(outer appearance)에 더 치중하여 하나님 앞에 값진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아무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것처럼(사53:2)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에게서 흠모한 말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2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으시고 풍채도 없으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십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 매력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다우십니다.  비록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2:8).  즉, 하나님 보시기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모습은 아름다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약하게 보이고 고운 모양이나 풍채는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움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마른 땅”인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연한 순 같”아 얼마든지 핍박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을지라도(박윤선) 위로부터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비록 외모로 볼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에게 어떠한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매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며 매력을 느끼는 외모에 치중하는 삶을 살기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값지고 매력을 느낄만한 내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값진 내적 사람을 가꾸되 순종의 사람으로 가꾸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 말씀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현대인의 성경)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새찬송가 94장(“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을 하나님께 찬양드리면서 우리는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함.  이 세상 행복과 부귀와 영화보다 주 예수님이 제일 귀하다는 고백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함.  멸시하되 얼굴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보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수님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한 2 가지 이유를 오늘 본문 이사야53장3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간고를 겪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는 근심된 일과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슬픈 일들을 많이 보고 듣고 또한 실재로 겪습니다.  참으로 눈물을 많이 흘릴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이 세상의 삶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닌 기쁨을 원합니다.  눈물과 아픔이 아닌 행복과 웃음을 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기쁨과 행복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행복한 삶, 행복한 가정, 행복한 공동체를 꿈꾸면서 달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기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귀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원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7장3절에서 “슬픔이 웃음보다” 낮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슬픔이 웃음보다 낮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고(슬픔)를 많이 겪으셨 다(a man of sorrows)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사53:3).  즉, 예수님의 비애의 사람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슬픔을 싫어하고 기쁨을 좋아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니 기쁨을 좋아하기에 우리는 슬픔을 많이 겪으신 예수님을 싫어 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예수님에게로부터 돌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간고(슬픔)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슬픔을 귀히 여긴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슬픔이 많은 우리를 체휼하시는 것처럼(박윤선) 우리도 슬픔이 많은 형제, 자매들을 체휼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는 자들로 함께 울”수 있어야 합니다(롬12:15).  이것이 바로 슬픔을 많이 겪으신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야 말로 바로 비애의 사람이신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입니다.

 

  •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질고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모든 면으로 발달되어서 참 편안함을 추구하는 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한 예로 과학의 발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얼마나 편안해졌습니까.  그러다보니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들이 있으면 너무 쉽게 불평하며 짜증을 내면서 원망까지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안한 길과 고난의 길 이 두 갈림길에 서 있으면 우리는 거의 평안한 길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평안함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길이 아닌 평안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하기에 예수님을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사야53장3절을 보면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자”(familiar with suffering)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고난에 익숙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고난 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고난에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새삼스러운 발견은 절대 아닙니다.  너무나 안락함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제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 는데 (히5:8-9) 결코 온전하지도 않은 저는 고난을 받는 것을 기피하므로 말미암아 순종함보다 불순종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결과 더욱더 온전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은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처럼 고난에 익숙해야 합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빌1:29)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으로 순종함을 배웁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입니다.

 

셋째로, 고난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 메시야 즉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bore) 우리의 슬픔을 당하” (carried)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와 슬픔을 지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속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모든 질고와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한 것입니다(4절).  실제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칭한 신성모독죄와 더불어 성전 모독죄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맞으며 고난을 당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은 이렇게 잘못 생각하였습니까?   사무엘하11장과 12장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밧세바를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인 충성된 우리아를 살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간교하게 자신의 간통 죄를 덮고자 충성된 군인인 우리아를 죽이는지 다윗의 죄악된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하11:27).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그의 죄를 들춰 내셨습니다(12장).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비유로 죄를 지적하였을 때 그 비유를 들었던 다윗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5절)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였지만 실상 마땅히 죽을 자가 자기 자신인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가 진정한 죽어 마땅한 죄 인줄 모르고 있었을까요?  결국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7절)고 말하였을 때에야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고 자백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처럼 우리 또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들의 결과인 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5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으며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으셨습니다(5절).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모든 질고와 슬픔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하였다 한 것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들을 위하여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슬픔과 질고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의 채찍 맞은 자국과 못 자국, 창자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한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질고가 돌이켜 우리의 구원과 평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누리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 자매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덕분입니다.  또한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상처는 싸매인바 되었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이 고난 주간, 저는 개인적으로 부족하나마 예수님을 고난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작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심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저 또한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싶은 영혼들을 저 또한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다가가시는 힘들어 하는 영혼들에게 저 또한 다가가고자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고난 주간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뜻이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귀히 여기시고 그 분의 순종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우리가 고난을 당하더라고, 심지어 죽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새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4절),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4월 7일,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길 기원하는(새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