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 (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사무엘하 16장 12절).

 

 

 

둘째로, 우리 하나님은 그 저주 때문에 선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돌이켜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잠언 26장 2절을 보면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요 그 저주는 공의롭지 않은 저주(an unjust curse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미련한 사람의 공의롭지 않는 저주는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6:2).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참새가 “떠도는 것”은 ‘목적이 없기’(aimless)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적 없이 하늘에서 떠도는 참새는 어디에 착륙(landing)해야 할지 몰라 그냥 허공에서 맴돕니다.  바로 까닭 없는 저주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목적이 없다는 것은 저주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는 …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롭지 않은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골리앗이 블레셋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지만(삼상 17:43-44), 다윗은 도리어 승리했습니다(48-50절).

 

만일 미련한 자가 까닭 없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를 저주하고 핍박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7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한 일에 대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이유 없이 비난하는 교만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시편 기자는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묵상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까?  시편 119편 86, 161절 말씀입니다: “주의 계명은 모두 신뢰할 만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  권력 있는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주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의 계명을 신뢰하였고 또한 권력있는 자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누군가 우리를 까닭 없이 힘들게 하고, 까닭 없이 비난하고 심지어 이유 없이 우리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한대로 실제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6장 12절 문맥(5-13절)을 보면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는 도망가는 다윗을 계속 따라가면서 계속하여 그를 저주했습니다(5, 13절).  계속하여 저주하되 시므이는 다윗에게 “살인자여!  악한이여!  여기서 사라져라!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너에게 갚으셨다.  네가 사울의 왕위를 빼앗았으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것을 너의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너는 사람을 죽인 죄로 이제 벌을 받아 망하게 되었다!”라고 저주했습니다(7-8절,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다윗이 도망자라 할지라도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그리고 그 주위엔 적어도 600명이란 군인들이 있는데 어떻게 시므이가 계속해서 다윗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다윗 왕을 따르는 자들 중에 아비새가 다윗 왕께 “어째서 왕은 이 죽은 개 같은 녀석이 왕을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가 가서 당장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9절, 현대인의 성경) 바로 다윗 왕의 답변입니다: “이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저주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면 누가 그에게 네가 어째서 이렇게 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어라.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10-12절, 현대인의 성경).  아니, 어떻게 다윗 왕은 아비새로 하여금 시므이의 목을 단칼에 베도록 할 수도 있었으면서 계속해서 시므이로 하여금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도록 가만 놓아두었을까요?  좀 놀라운 장면은 시므이가 비탈길로 계속 따라오면서 여전히 다윗 왕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렸을 때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 말없이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왜 다윗 왕은 그리한 것일까요?  왜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계속 들으면서 아무 말없이 길을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혹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그 저주 때문에” 선으로 자기에게 갚아주시리라 기원하며 기대했기 때문입니다(12절).  다윗은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침묵하면서 시므이의 저주를 계속 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기원하며 기대했던 하나님은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23:5).  비록 시므이는 계속해서 다윗 왕을 저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변하여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은 실제로 시므이의 저주대로(삼하16:17) 그는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살인자였고(삼하11:17) 또한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일을 행한(27절) 악한 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므이의 저주를 이미 돌이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백한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12:13).  다시 말하면,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대로 “사람을 죽인 죄로 이제 벌을 받아 망하게 되”야할 사람이었지만(16:17, 현대인의 성경) 그의 죽을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12:13).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잠시 징계하여 압살롬에게 도망하여 광야로 몰아내셨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겸손케 하시사(참고:신8:2)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케 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간구케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사 다윗의 친구 후새(37절)의 계략을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게 들리게 하시사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이 후새의 계략을 택하여 시행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난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책략을 좌절시키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17:14,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사 그의 왕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18-19장).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므이의 저주를 변하여 다윗에게 복이되게 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통함을 감찰하시고 시므이의 저주 때문에 선으로 다윗에게 갚아 주신 것일까요? (16:12)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민22:12).  그는 어떠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언약의 말씀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삼하7장).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그 저주를 돌이켜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셨기에(삼하7:16) 시므이의 그 저주를 돌이켜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