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 (3)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사무엘상 18장 12절).
작가 프랭크 타이거(Frank Tyger) “우정”(Friendship)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정은 기꺼이 들어주는 귀, 이해해 주는 마음, 도와주는 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는 이 글을 2009년 7월(21일)에 접한 후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우정을 쌓아가는 개척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친구를 만나고 세우는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친구들, 그 만남과 교제 가운데 우정을 쌓아가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듣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파하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을 정도로 듣고 싶습니다. 상처 입은 친구의 이야기를 내 기준으로 들으면서 '그거 별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 기준을 내려놓고 상대방 입장에서 듣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 또한 상처 입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크게 느껴져서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를 겸손한 자세로 경청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듣는 자가 될 때에 상대방 친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듣는 자는 이해하는 자라 생각됩니다. 친구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을 나눌 때에 어찌 진지하게 듣지 않겠습니까. 함께 울지 못함이 미안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울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눈물의 의미가 내 마음에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10%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0%라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형식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자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투명성을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이것저것으로 포장된 마음보다 자기가 상처 입을 확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투명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그립습니다. 진심으로 듣고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자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말로만 돕지 않습니다. 기도 부탁하면 그 때 기도합니다. 기도하겠다고 말한 후 기도하기를 잊어버리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싫습니다. 돕는 손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돕는 손도 내 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나의 손을 통하여 나타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서 영광 받기를 원합니다. 듣고 이해하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져 빨리 돕고 싶을 때에라도 먼저 주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 그 친구를 맡기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은 요나단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이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바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그 첫 만남의 이야기가 사무엘상 18장 1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사울 왕과 다윗의 대화가 끝난 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하여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이스라엘 왕 사울이 대화를 했는데 그 후에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다고 현대인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과 같은 사람(사도행전 13:22)에게 우리 마음이 깊이 끌리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우리 생명처럼 사랑케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즉,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그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일하심을 더욱더 깊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마음이 다윗에게 깊이 끌려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기에 그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으며 또 자기 갑옷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습니다(삼상 18:1, 3-4,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요나단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되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인 다음 승리한 이스라엘 군이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여자들이 승전을 축하하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라고 노래했을 때 사울 왕은 그 노래를 듣고 대단히 불케하여 혼자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셈인가? 저들이 다윗에게는 수만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을 돌리다니! 다음번에는 저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겠구나”(6-8절, 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얼마나 불쾌하였길래 그 날부터 다윗을 계속해서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사울)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임을 받으면 충분히 질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하기 보다 하나님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낮춰서 다른 사람을 우리보다 낫게 여기고 우리의 모든 특권을 버리며 종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20:28; 빌 2:3-8,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참고: 빌 2:9-11).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자기보다 더 높임을 받은 다윗으로 인해 그 날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다가 바로 그 다음날 하나님이 보내신 악령이 강하게 사울을 사로잡자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대다가 자기 곁에 세워 둔 창을 갑자기 다윗에게 던져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이 던진 창을 두 번이나 피해 도망한 것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창을 던진 것 같습니다(삼상 18:6-11,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질투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다윗은 적군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를 향해 달려갔었는데(17:48,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아군이 사울 왕으로부터는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입니다(18:11, 현대인의 성경).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쩔 때는 적군보다 우리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아군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 왕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울 왕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며 무척 사랑하며(1, 3절, 현대인의 성경) 심히 좋아하고 있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19:1)은 다윗을 살리려고 그를 도와줬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내 아버지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 너는 조심하고 내일 아침 들에 가서 숨어 있거라"고 귀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2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이렇게 칭찬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신하 다윗을 해하지 마십시오. 그가 아버지를 해칠 만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모든 일에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골리앗을 죽인 것과 그리고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주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그때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이제 와서 그처럼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범죄하려고 하십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4-5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3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요나단은 아버지의 명령(1절)을 어겼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순종하되 주님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엡 6:1), (2) 요나단은 심히 사랑하는 다윗을 위기 때 도와줬습니다. 진정한 사랑하는 친구는 위기 때 그 우정(friendship)이 빛을 발합니다, (3) 요나단은 살인적인 질투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기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했다는 그 자체가 놀랍습니다. 왠만한 사랑과 용기가 아니면 그리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하는 친구는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고(죽음을 각오하고) 자기 친구를 위기에서 건지고자 도와줍니다. 귀한 친구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자기에게 노발대발하면서 "이 미친 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녀석이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를 끌어오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30-31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도 또 다시 사울에게 "어째서 그가 죽어야 합니까? 그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따졌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친구 다윗을 응호(defend)하는 요나단을 생각할 때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시 72:4). 그러자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그에게 던졌던 사울은(18:11, 19:10) 자기 아들인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그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20:33). 그러나 다윗뿐만 아니라 요나단도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치시사 죽이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보면 요나단은 죽음 일보 직전에 있었던 다윗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죽음 일보 직전에 있다는 다윗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을 알게 하실 때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인 사울이 언제나 그가 하는 일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자기에게 말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사울이 자기가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결코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런 일(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이라고 해서 나에게 숨길 리가 없어. 결코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자기와 요나단과의 우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사울이 아들 요나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요나단에게 알리지 않은 것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3,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아서 사소한 것까지 모두 다 대화를 한다 할지라도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대놓고 아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말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사 53:10).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5절).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사(6절) 십자가에서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고(엡 1:7; 골1:14) 의롭게 되었습니다(사 53:11).
친구되신 예수님의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2월 18일, 사랑하는 딸 예리의 생일을 축하면서 그녀를 주님의 사랑으로 더욱더 사랑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