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 (1)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사무엘상 18장12절)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지난 주 화요일(2023. 1. 24.) 아침에 사무엘상 9장을 묵상하면서 3가지 적용을 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기도)를 들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고통 속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의 삶 속에 만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남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무엘상 18장 12절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이란 제목 아래 사무엘상 17장에서 20장까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에 만나게 하신 3명 중 한 명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야기가 사무엘상 16장 21-23절에 나옴.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는 순간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사랑하고 그를 자기 호위병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사울은 사람을 이새에게 보내 '다윗을 내 곁에 있게 하라. 내가 그를 무척 좋아한다.' 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하나님이 보낸 악령이 괴롭힐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은 상쾌하여 낫고 악령은 그에게서 떠나갔다.”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나게 된 배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에게서 떠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했습니다(괴롭혔습니다)(14절).  흥미로운 점은 사울 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자신의 왕을 번뇌하게 하고 있다(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6절).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점은 그 신하들 중 한 사람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의 8명의 아들들 중 하나님께서 막내 아들인 다윗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이스라엘 두 번째 왕이 될 다윗을 보는 순간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사랑하고 그를 자기 호위병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다윗과 사울 왕의 첫 번째 만남은 매우 좋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크게 사랑”했음(21절).  사울 왕은 다윗을 무척 좋아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자기 곁에 있게 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매우 좋았던 첫 번째 만남이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 18장6-9절에 나옵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다음 승리한 이스라엘군이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여자들이 승전을 축하하여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사울 왕을 환영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  사울은 이 노래를 듣고 대단히 불쾌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셈인가?  저들이 다윗에게는 수만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을 돌리다니!  다음번에는 저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겠구나.'  그 날부터 사울은 계속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9절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를 보면 ‘질투의 눈으로 계속 보았더라’(“And from that time on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를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The New Strong's Dictionary of Hebrew and Greek Words에 의하면 ‘to watch with jealousy eye’(질투의 눈으로 보다)입니다.  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본 것입니까?  그 대답은 “그 날 후로” (9절)에 있습니다.  “그 날”, 즉 다윗이 불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6절)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고 말했습니다.  그 때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라고 말한 날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드라마의 주인공이였던 사울 왕인데 골리앗을 죽이므로 조연출도 아니였던 목동 다윗이 주인공으로 등극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고(1, 3절) 또한 사울의 딸 미갈도(20, 28절)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도 다 다윗을 사랑했습니다(16절).  그러니 사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던 사울(12, 14, 28절)은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힘 있게 내리므로(10절)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던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다윗을 벽에 박고자 손에 든 창을 다윗에게 던졌습니다(10-11절).  사울 왕은 자기가 직접 창을 던져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 다가 실패하자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사울 왕은 자기의 딸까지 다윗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사울은 자기가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자기 딸뿐만 아니라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까지 이용했습니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틈만 보이면 다윗을 함정에 빠뜨려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하려고 했습니다(20-21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우리를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해치려고 수단방법을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기 시작한 후부터는(9절, 현대인의 성경) (1) 자기 자신이 창을 다윗에게 던져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고(10-11절, 현대인의 성경), (2) 자기 딸까지 이용하여 다윗을 적군인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17, 21, 25절, 현대인의 성경), (3) 이제는 자기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까지 다윗을 죽이라고 지시까지 했습니다(19:1,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살인적인 질투는 어느 누구를 통해서라도 그리고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질투의 대상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사울 왕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곁에서 떠나게(추방) 했을 뿐만 아니라(13절)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고 알므로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그는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보기에도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리려고 했습니다(19:5).

저는 다윗의 이 첫 번째 만남인 사울과의 만남을 묵상할 때 아무리 첫 번째 만남이 매우 좋은 만남이었다 할지라도 그 매우 좋은 만남이 질투로 인하여 충분히 나쁜 만남은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성경은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였다(16:21)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울은 그렇게 크게 사랑하였던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리도 평생에 대적이 되어 끊임없이 그를 죽이려고 했는지 참 이해가 안 되는 관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질투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질투는 까닭 없이 상대방을 싫어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어 그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며 심지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만들어 살인을 시도하게까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질투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적 질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질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질투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25장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질투심은 “위로부터 난”것(약3:17)으로써 성경적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질투심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비느하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질투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출20:3).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마6:24).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마22:3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39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의 첫 번째 만남이 사울과의 만남을 묵상할 때 그 둘의 처음 만남은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고 그를 자기 곁에 둘 정도를 다윗을 무척 좋아했으므로 우리가 보기엔 매우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를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변질된 것입니다.  변절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함께하는 사울이었습니다.  최고로 좋아 보이던 만남이 최악의 만남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최악의 만남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최고의 만남을 원합니다.  그 최고의 만남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이 최고의 만남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고(엡2:1, 현대인의 성경),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롬5:10)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요:316) 또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화목제물로 죽게하시사(요일4:10) 우리와 화목케하셨습니다(골1:20, 2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사(소명)(롬8:30)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중생, 첫 번째 부활)(딛3:5),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케하시사(회심)(행3:19, 5:31)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믿음)(엡2: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롬6:23).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만남을 최고의 만남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남이심을 고백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오시는 날(재림) 주님 안에서 잠든 성도님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두 번째 부활)(살전4:16).  그 때까지 살아있는(17절) 성도님들은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고전15:51-54).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전13:12, 현대인의 성경).  우리 모두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신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믿음과 사랑으로 답변하는 것입니다(계22:20).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2월 4일, 최악의 만남을 최고의 만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