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탄식”
[로마서 8장 19-27절]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19-27절을 보면 성경은 세 가지 탄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피조물의 탄식: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 우리의 탄식: (23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3) 성령님의 탄식: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세 성경구절을 보면 개역개정 번역본에는 다 “탄식”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다른 번역본(예를 들어, 표준 새 번역)을 보면 피조물과 우리는 “신음”이라고 번역을 했고 오직 성령님만 “탄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기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의 ‘신음 기도’와 (2) 조물주이신 성령님의 ‘탄식 기도’. 우리의 ‘신음 기도’와 성령님의 ‘탄식 기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1) 우리의 신음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26절)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이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26절).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음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신음 기도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서 고통에서 건져달라는 우리가 원하는 기도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음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한 기도이면 응답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뜻대로 간구한 기도이면 응답이 거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성가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후렴인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란 가사는 우리의 신음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한 경우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아닌 우리의 뜻대로 드린 신음 기도의 경우가 아닙니다.
(2)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기도입니다(26-27절).
로마서 8장 27절 새번역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탄식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되는 기도입니다. 응답받는 이 성령님의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탄식 기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기도(34절)와 동일한 기도로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태복음 26:39, 새번역). 또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린 기도가 생각남: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새번역)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성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도 생각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새번역)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11:4).
첫 번째 탄식인 피조물의 탄식(신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 22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새번역)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피조물의 탄식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기에 “신음”하는 것입니다(22절, 새번역). 피조물이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유는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새번역)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해서 벌을 받을 때에(창3:17-19) 피조물은 저주를 받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굴복케하시므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므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롬8:20, 새번역). 마치 어미가 해산의 고통을 겪을 때에 그녀의 소망은 새 생명인 아기가 태어나는 것인 것처럼 해산의 고통을 겪는 피조물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새번역)[(개역개정)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21절).
두 번째 탄식인 우리의 탄식(신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새번역)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로서 영혼이 성령님으로 인해 거듭난(중생한) 사람임. 성령님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탄식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입니다. 이 “몸의 속량”이란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탄식인 성령님의 탄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새번역)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우리 자신 때문에 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신음 기도하는 피조물과 우리와 달리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요 또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이 못하지만” (새번역)] 성령님은 우리의 이 연약함을 도우시느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27절). “마음을 살피시는”[“사람의 마음을 꿰뜷어 보시는”(새번역)] 성부 하나님은 성령님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고 계시기에(27절, 새번역)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탄식 기도드리는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복음성가 “누군가 널 위하여” 가사입니다: (1절)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2절)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하네, (후렴)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롬8:34),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연약함을 도우시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26-27절). 그러므로 우리는 “날 구원하신 주 감사” 2절 가사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심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