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섬김의 지경을 넓혀주소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실천하게 하려고 내가 모범을 보였다”](요한복음 13장 15절).
새해 2024년 표어는 “주님, 섬김의 지경을 넓혀주소서”입니다. 그리고 표어 구절은 요한복음 13장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실천하게 하려고 내가 모범을 보였다”].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섬김”에 대해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기도하고 소망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 교훈을 겸손히 받아 주님의 말씀대로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섬김의 마음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섬김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얼바인 베델 교회 목사님이셨던 고 손인식 목사님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잠드신 후(2020년) 한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그분의 부인이신 손승옥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을 기억하시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홀로 남은 저는 모든 추억을 가슴에 끌어안고 남은 사역을 감당하다 천국에서 만나겠다. 못난 저를 끝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했다. 사랑한다”(인터넷).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17장 9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13:1)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로서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의 것”임.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저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사람들 중에 가룟 유다가 포함이 되었을까 입니다. 제가 이 질문은 던지는 이유는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성경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판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깨끗하지도 않은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사 그의 발까지도 씻겨 주셨습니다(10-11절). 이러한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 중심으로 “섬김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이란 제목 아래 이러한 말씀 묵상의 글을 썼습니다(2022. 2. 15.):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는 하인들이 먼지 묻은 손님의 발을 씻겼다. 그러나 예수님(주님, 선생)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게 섬기는 자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섬김을 받기 보다 먼저 섬기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마음을 직접 보여주신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뿐이 아니라 사랑의 모습, 섬김의 모습이 삶 속에서 있어야 함을 교훈하신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시니어에 맞는 대우와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그 마음을 갈아엎어서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 역할과 권한을 사용하되 사랑의 마음, 섬김의 마음으로 대하고 관계를 맺는 하루되길 원한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몸소 보이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이 오늘 내 삶에도 있기를 원합니다. 따뜻한 말, 진실되게 들어주고 공감하는 태도, 섬김이 자연스레 몸에 베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둘째로, 섬김의 자세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섬김의 자세는 겸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4-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우리가 이미 골로새서 3장 12절을 묵상하면서 새 사람인 우리가 입어야 할 “겸손”(humility)이란 자신을 마지막에 두고 자신을 최소한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KJV 성경 주석).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20장 16절 말씀인 “이와 같이 나중 된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도 묵상했습니다. 여기서 겸손한 자라 나중 된 자로서 자기 자신을 마지막에 둔 자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자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현대인의 성경)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며 …”]. 에베소서 3장 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 디모데전서 1장 15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현대인의 성경) … 나는 죄인 중에서도 두목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그 당시 지방의 먼지와 더러운 상태로 인해 발을 씻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고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을 것이지만, 서로의 발을 씻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사회에서 발 씻기는 것은 가장 천한 하인들을 위한 것으로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This was because in the society of the time footwashing was reserved for the lowliest of menial servants”). 그래서 동료들끼리는 매우 드물게 서로의 발을 씻지 않았으며, 그것은 큰 사랑의 표시로만 이루어졌습니다(맥아더). 그런데 실재로 누가복음 22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가장 위대하냐(누가 크냐)고 하는 문제로 말다툼”까지 한 사람들이었음. 이런 사람들이 서로의 발을 씻겼을까요? 만일 이렇게 제자들끼리도 서로의 발을 씻기지 않았는데 혹여나 큰 사랑으로 표시로만 서로의 발을 씻겼다면 그 제자들의 입장에서 자기들의 “선생”님이시요 또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13-14절) 자기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랑이었겠습니까? 아마 어쩌면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셨을 때 예수님에게 “안 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에게 섬김을 받는 자로서의 겸손한 자세인가 생각할 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히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이시요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겸손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참고: 마16:23). 마태복음 16장21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밝히기 시작하셨을 때(21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예수님을 말렸습니다(22절).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23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25절, 현대인의 성경).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버리고(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주님이시요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내 발을 씻기실 때 순종하여 예수님의 씻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내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겸손이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의 본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는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받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 주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순종)합니다(빌2:8). 만일 주님의 뜻이 예수님처럼 깨끗하지 않은 자기를 팔 사람이 가룟 유다인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사 몹시 괴로워하시면서도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겨주신 것(1, 10-12, 21절, 현대인의 성경)처럼 우리도 그리 행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원하는 것 등을 다 버리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의 발까지 씻기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에만이 우리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여 겸손히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섬김의 목적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섬김의 목적은 구속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0-1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일까요? 그것도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일까요? 즉,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일까요? 그저 그들의 발이 먼지로 인하여 더러워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겸손히 섬기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말처럼 그들의 “주”님과 “선생”님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므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즉,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예수님의 겸손의 본을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절)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도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그 주된 목적은 그 제자들을 영적으로 깨끗케 하는 것(6-9절)이었습니다(맥아더). 이 목적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몰랐음.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7절에서 “…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의 답변은 예수님의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씻기지 않으면 (즉, 제자들의 발을 씻음의 상징으로 묘사된 대로), 그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맥아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목적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자에 그들을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또한 성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구속은 단번이요 계속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 신자들은 계속해서 거룩하게 되야 합니다(성화되야 함).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물론 문자적으로 서로의 발을 씻기는 행사도 할 수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예수님처럼 겸손히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겸손히 섬기는 목적은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 구속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섬긴다면 그 목적은 그들의 성화(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전서 1절 22절을 예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임: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야 함. 이러한 성화의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순결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섬김의 지경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섬김의 지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라고 질문했을 때 말씀하신 답변으로서 이 예수님의 답변 자체가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에 국한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사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인 사마리아와 심지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권능을 받지 못한 제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지적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우리의 섬김의 대상에 우리 가정이나 교회가 친지들에게만 국한하고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 지적하고 계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저자 누가가 누가복음 24장49절에서도 말씀하였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위로부터 능력”, 즉 “권능”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권능’은 제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정치적인 파워나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경건한 생활의 개인적인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주석). 이 권능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에게 임한 성령이 그로 하여금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능력으로 시작하게 했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동일한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유상섭).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위로부터 능력”, “권능”은 복음 사역을 감당케하는 능력을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권능”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이웃을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섬기되 우리는 섬김의 대상을 섬기기 편한 사람들에게만 국한(제한)하지 말고 성령의 권능(능력)을 받아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섬김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루살렘”인 우리 가정부터 섬기기를 시작해서 우리의 “온 유대”인 온 교회 식구들(세 사역 식구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마리아”인 우리 이웃들 및 “땅 끝까지” 가서 이웃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섬김에 대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느냐, 손가락 하나로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로 기준을 삼는다. 또는 지적인 수준과 학문적인 탁월함, 임원을 맡고 있는 모임이 몇 개인지를 따지기도 한다. 또 많은 이들은 은행 잔고와 자산과 물질적 소유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위대함을 가늠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리는 평가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주님의 평가 기준은 오직 한 가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다. 그 속에 위대함이 있다. 정말 예수님을 닮고 싶다면 누군가를 섬기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다. 세상이 의혹에 찬 눈길로 교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야 말로 크리스천이 마땅히 시도해야 할 도전이며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믿음을 방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바클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