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자!

 

 

나 자신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자:

 

  1. 나의 모든 수고가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전 1:3)

 

  1. 내가 추구하는 희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2:2)

 

  1. 내게 지혜가 있었다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15절)

 

  1. 내가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는가? (22절)

 

  1. 지금 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3:11) 영원히 있을 것(14절)을 추구하고 있는가?

 

  1. 지금 나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22절)

 

 

 

 

 

나 자신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에 우리 자신을 팔아서는 아니됩니다(왕상 21:20, 25).

 

 

 

 

나 자신의 힘으로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좀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참고: 레 14:32).

그래야 우리는 철저히 무기력함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시 18:1).

 

 

 

나 자신이 극히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

 

 

왜 하나님께서는 "극히 약하고" "가장 작은 자"인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하셨을까요?(삿 6:14-15)

 

왜 주님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극히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너의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주님은 "이 너의 힘으로"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어쩌면 '이 힘'이란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란

하나님의 말씀 일수도? (12절)

 

 

'나 죽어도 용서못해'?

 

 

 

'나 죽어도 그 사람 용서 못해'라고들 말하는데

우리는 죽기 전에 꼭 용서해야 합니다

(참고: 눅 23:34)

 

 

 

 

나 혼자 살자고 함께하지 않고 도망한다면?

 

 

 

우리가 접한 위태한 상황이 길어지고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그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 중에서는 절망 중에 도망(도피)하려고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이루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행 27:9, 18, 20, 30-31).

 

 

 

 

 

나뉘이면 아니됩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함에 있어서 나뉘이면 아니됩니다.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

그 아들들이 그녀의 태 속에서 서로 싸웠습니다(창25:21-22). 

그 때 리브가는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22절).

히나님께서 그녀에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그런데 왠지 하나님의 "나누이리라"는 말씀이 두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 장성하여 이미 부모님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8절).

 

 

 

 

나는 그들 앞에서 떳떳한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정도로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한 바울,

그는 자기를 고발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행 25:7-11).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되 적대시까지 하는 사람들이 나를 고소한다 할지라도

만일 내가 그들에게 아무 불의나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내 양심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 앞에서 떳떳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고 있는 것일까?

(고후 3:3)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숨기지 말고 드러내어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요 1:20).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잘못된 기대대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대하시는대로만 살면 됩니다.

 

 

 

 

 

 

 

 

나는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주님이 "오라"(Come)고 나를 부르시면 나는 물 위라도 걷고 싶습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calling)에 순종하여 먼저 믿음으로 "배에서 내려"오길 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배 안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보다

주님이 서 계신 물 위로 걷는데 더 나은 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질 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배 안에 있기 보다 주님이 계신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마 14:24-32).

 

 

 

나는 어느 것을 주목하고 있는가?

 

 

육신의 눈은 잠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만

믿음의 눈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주목합니다(고후 4:18).

 

 

 

나는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두려워해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징벌이 더딤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 짓는 것을 양심에 꺼리낌 없이 담대히 해서는 안된다(전 8:11).

그 이유는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나를 책망하시며

내 죄를 내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두려워해야 한다(시 50:21).

나도 죽기 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호수아처럼

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식구와 교회와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하고 싶다(수 23:14):

 

'나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요한복음 6장 1-15절(개인 약속)과

마태복음 16장 18절(교회 약속)의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나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나는 마음과 뜻으로 압니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위하여"(삼상 22:3)

이 모든 일들을 주시던지 아니면 허락하시는지 ...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다녔던 다윗이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요나나,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가,

마음이 슬펐던 한나나, 두려워했던 기드온이나 ... 등등 ...

 

이 모든 인물들이 나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결론적으로 성경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이 생각났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나를 해하려는 사람을 아낄 수 있을까?

 

 

나를 해하려는 사람을

내가 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셨기도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아껴서 ...?

(사상 24:10)

 

 

 

 

 

 

 

 

나를 향한 사람들의 변화는 생각은 ...

 

 

멜리데 섬에 사는 원주민들이

사도 바울을 "살인한 자"로 생각했다가

"신"으로 생각한 것을 보면(행 28:1, 4, 6)

나를 향한 사람들의 변하는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만 장관을 구원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전에"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왕하 5:1).

그 결과 나아만 장관은 그의 주인인 아람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1절).  그런데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1절).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아온 적이 있는데

그녀가 나아만 장관의 아내를 시중드는 하녀가 되었습니다(2절).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의 자녀를 사용하시사 그녀가 자기의 주인인 나아만 장관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절)고 절하므로 말미암아

결국엔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갔습니다(9절).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전혀 나아만의 생각과 달리(11-12절) 나아만에게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말했습니다(10절).

 

그렇지만 결국에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순종하므로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14절).

 

그 결과 나아만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게되었습니다(15절).

또한 그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언제나

그 밖의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나아만을 하여금 아람을 구원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의 나병만 구원하신게 아니라 그의 영혼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방인 나아만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하셨습니다(행 10장).

나에게 해를 입힌 식구를 어떻게 용서하란 말입니까?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

나를 해하려고까지 한 그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악을 갚는게 우리의 옛 본능일진데

어떻게 성경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악한 사람에게 선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살전5:15)

 

어떻게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을까요?(롬12:21)

어떻게 우리는 그 악한 사람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수가 있을까요?(살전5:15)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그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자리를 죽이려고까지 한 자기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는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다가 110세에 죽었습니다(창 50:21, 26).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었을까요?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에(시34:8)

자기를 해하려고 했던 형들에세 선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엡 2:10).

다시 말하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았기에(창50:20) 그는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여 죽을 때까지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해하려고 한 악한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녀를 위로하며 보살펴주기까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녀가 우리를 해하려 한 악한 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아가심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깨닫게 하실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이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나의 거만함은 …

 

 

나의 거만함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성숙한 신앙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과

그 분의 책망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거만함은 나를 사랑해서 책망해주신 분을

싫어(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자기를 사랑해서 책망을 해주시는

지혜로우신 분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교훈을 더하여 더욱 지혜로워지는데 ...

(잠 9:8-9).

 

 

 

 

"나의 괴로운 날"

 

 

"나의 괴로운 날"이 "내가 부르짖는 날"이길 원합니다(시 102:2).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있다면 ...

 

 

 

만일 우리가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 은혜의 힘으로 마땅히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고 행함으로 수고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고전 15:10).

나의 낙심이 나의 소망으로 바뀌는 이유는 …

 

 

고난("재난")은 ... (애3:19)

우리 마음에서 평강을 멀리 떠나게 만듭니다(17절).

우리의 힘과 우리의 소망을 끊어놓을 때도 있습니다(18절).

우리의 마음이 고난(재난)을 기억하므로 충분히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20절).

 

그런데 어떻게 그 고난(재난)을 우리가 우리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될 수가 있습니까?(21절) 

어떻게 우리 마음에 평강과 힘과 소망을 끊어놓고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하는 고난(재난)을 우리 마음에 담아 두었을 때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임한 고난(재난)만을 바라보면

"나의 소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난(재난)을 우리에게 내리신(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나의 소망"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즉,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회개치 않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성실하게(23절) 징계를 내리시되 그것도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시사 내리시고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궁하신(실패가 없으신)

긍휼하심으로 내리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낙심(19절)은 우리의 소망(21절)으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말과 행하는 일

 

 

나의 말은 정직해야하며

나의 행하는 일은 다 진실해야 한다(참고: 시 33:4).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나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 주님께서

나를 모든 면으로 구비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나의 미련함은 …

 

나의 미련함은

현재의 나의 잘못된 선택이 나중에 나에게 어떠한 쓰라린 결과로 오는지를

무지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잠 5:3-5).

 

 

 

나의 미련함은 …

 

 

나의 미련함은

내 길이 든든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잠 5:6).

 

 

나의 미련함은 …

 

나의 미련함은

성적 유혹과 싸우면서 자신의 취약점을 알면서도

다른 이성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 하는 것이다(잠 5:8).

나의 미련함은 …

 

 

나의 미련함은

그 때 그 분의 훈계와 꾸지람을

왜 내가 마음으로 싫어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듣지 않으므로

지금 이러한 쓰라린 결과를 겪고 있는지

후회하는 것이다

(잠 5:11-14).

 

 

 

 

 

나의 믿음

 

 

나의 믿음은 내 자신이 볼 때에

너무나 형편이 없어서

나 자신도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이다.

 

나의 바램은

하나님을 향하는 나의 믿음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좋게 소문이 나서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살전 1:8).

 

 

나의 삶의 원동력

 

 

 

나의 삶의 원동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므로(고후 5:14)

어떠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이제는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갈 2:20).

나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므로 그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인하여

나는 내게 주신 사명과 사역을 희생적으로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

사랑의 빛진 자의 자세로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롬 13:8).

그 사명과 사역은 바로 화목케 하는 것이다(교후 5:18).

나는 이웃과 이웃을 화목하게 하는 화목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18절).

또한 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 영혼, 영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그 영혼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해야한다.

이것이 나의 삶의 존재 목적이다.

 

[2016 승리 36주년 말씀집회 둘째날 주신 말씀 묵상]

 

 

 

 

 

 

 

 

 

나의 십자가란?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져야할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 식구와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올 수 있는 가족의 어려움과

내 삶과 생명의 어려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눅 14:26-27).

 

 

 

나의 어리석음은 …

 

 

나의 어리석음은

나의 마음과 귀를 닫게 만들어

"이리로 돌이키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잠 9:4, 5, 16).

 

 

 

나의 울음이 ...

 

나의 울음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행 21:13).

나의 죽음을 …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요 11:4).

우리는 우리 가족, 친척, 교회 식구들, 친구, 이웃을 위하여

또한 그들에게 유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50-52절).

 

 

 

나의 죽음을 보고 ...?

 

 

나의 죽음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막 15:39; 왕하 4:9)

 

 

 

나의 충고자, 나의 즐거움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충고자"입니다(시 119:2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교만할 때, 내가 주님의 계명을 떠날 때 꾸짖으십니다(21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시므로 주님께 범죄하지 않게 하십니다(11절).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즐거움"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열어서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18절).

그 놀라운 것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아가시므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십니다(17절).

그러므로 사람들이 나를 비방할 때에도 나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23절).

“나의 탓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제사장 아히멜렉이 죽임을 당한 것이

자기 탓인 줄 알았습니다(삼상22:22).

 

우리도

주님의 종이 해(고통?)를 당하는 것이

"나의 탓"(22절)인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목사님들은

성도님들이 힘들어 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의 탓"인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중년에 데려가지 마소서"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시 102:3),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11절),

하나님께서 "내 날을 짧게 하셨"지만(23절),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중년에 데려가지 마소서.

주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24절, 현대인의 성경).

 

나중에 사랑받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사랑을 받고자 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보다

그 사람을 경책하므로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 28:23).

 

 

 

낙망, 갈망, 소망!

 

 

낙망 될 때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갈망하자(시 43:2, 5, 11).

 

 

 

낙심하며 불안해 할 때

 

 

내가 낙심하고 불안해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고 하나님을 그리도 갈망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는 내 영혼에게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제임스야,

너는 왜 낙심하며 왜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재하시사 나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할 것입니다

(시편 42, 43편).

남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

 

 

자신의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지금도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

너는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사 65:2, 3, 5)

 

 

 

남을 탓하는 이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진실로부터 숨기기 위해서 남을 탓합니다(창 3:12-13).

 

 

 

남의 배우자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아야 하는데(출20:17)

이웃의 배우자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남편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삼하12:9-10).

남의 아내(남편)

 

 

남의 아내(배우자)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녀(배우자)와 통간하지도 말며,

그녀(배우자)를 만지지도 말아야 합니다(잠 6:25, 29).

 

 

 

남자만 약 5,000명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로

남자만 약 5,000명 되는 무리들을 먹이셨는데(눅 9:13-14)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으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남자만 약 5,000명이었습니다(행 4:1-4).

 

 

 

남편/아버지의 책임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골 3:19, 21).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

 

 

시력이 약한 레아는(창29:17) 남편인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여(31, 33절)

괴로움 속에 있었던 여자였습니다(3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시사

자녀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31-35절).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을 보시고 그녀의 괴로움을 돌보십니다(32절).

하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30:17) 그녀에게 후한 선물을 주십니다(20절).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했던 아내 ...

 

 

 

남편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내 레아는(창29:31)

야곱과 함께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받에 있는 굴에 장사되지만(49:30-33),

야곱에게 사랑을 더 받았던 라헬은(29:18, 30)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여브랏 부근에서 장사됩니다(35:16-20).

 

 

 

낮게’가 아니라 “낫게”

 

 

자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는 것은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낫게" 여깁니다(빌 2:3).

낮아짐을 당했습니다.

 

 

나는 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했습니다(시106:43).

나의 죄악은 교묘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33, 43절).

나는 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 그들의 행위를 배워 우상을 섬겼습니다(35-36절).

그러므로 나의 행위는 더러워졌고 내 마음은 음탕하였습니다(39절).

그 결과

나는 하나님을 격노케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징계하셨습니다(29, 40절).

그 징계의 결과로 나는 낮아짐을 당했습니다(43절).

 

 

 

낱낱이 드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낼 것입니다(시 50:21).

 

 

 

내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시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고

계속 같은 죄를 짓고 있으니 ... ㅠㅠ

(롬 2:4)

내 눈 속에는 티 정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3),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의 눈 속에서 들보를 보고 내 눈 속에는 티 정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될 때 ...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될 때

예수님처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 내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굴복시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데 ... ㅠㅠ (눅 22:44)

 

 

 

“내 마음 속에 걱정이 태산 같았을 때”

 

 

"내 마음 속에 걱정이 태산 같았을 때"(시 94:19,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14절).

오히려 주님은 내게 도움이 되셨습니다(17절).

'하나님, 제가 미그러집니다'라고 외칠 때에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18절).

결국 주님께서는 주님의 위로로 내 영혼을 즐겁게 하셨습니다(19절).

내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졌다는 증거는?

 

 

 

내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졌다는 증거는

내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내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딛 1:15-16).

 

 

 

내 마음에 유익한 슬픔과 근심?

 

 

마음에 유익한 슬픔과 근심을 하십시다(전 7:3).

나의 끝(죽음)을 마음에 두므로 오는 슬픔과 근심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2절).

 

 

 

내 마음의 근심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될 때 ...

 

 

주님이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것 같은 생각(느낌)이 들정도로 내 영혼이 번민하고

내 마음의 근심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될 때

나는 오직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의지하며

나의 마음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할 것입니다

(시 13:1,2, 5).

 

 

내 마음의 탐욕은 …

 

 

내 마음의 탐욕은 내 눈으로 하여금 허탄한 것을 보게 만듭니다(시 119:36, 37).

 

 

 

내 마음이 교만하면 …

 

 

내 마음이 교만하고 내 눈이 오만하면

나는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쓸 것이다(시 131:1).

 

 

 

내 마음이 완강하게 됨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내 마음이 완강하게 됨을 매우 경계해야 한다(출 10:1, 20, etc.).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면'(롬 1:24, 26, 28) 내 마음은 완강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부지런히 해야 할 책임은

"불"과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렘23:29) 내 마음이 녹아지고 부서지도록 해야 한다.

나는 계속해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엡 6:17)

부지런히 내 마음(양심)에 찔리도록 해야 한다

(삼상 24:5. 10; 행 2:37).

이렇게 나는 내 "묵은 땅"과 같은 내 마음을 "기경"해야 한다(호 10:2).

성령님께서 나에게서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여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길 기원합니다(겔 36:26,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