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는 입을 막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입을 막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자들, 헛된 말을 하는 자들, 속이는 자들,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 자들 (딛 1장 10-11절).

 

 

 

교회 안에서 나의 불평이

 

교회 안에서 우리의 불평이 다른 형제, 자매들을

충분히 낙심시킬 수가 있습니다(민 14:36, 신1:28).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들을 낙심시키는 원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또한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민 14:11, 24).

 

 

교회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한 사람?

 

 

주로 교회 안에서도 보면 적지 않은 소동을 일으키는 주동 인물은 한 사람입니다(행 19:23-24).

그 한 사람이 소동을 일으키는 본심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욕심 때문입니다(25, 27절).

그 주동 인물은 자기가 가까운 사람들이나 관련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25절)

파를 만들고 그들을 충동질 합니다(21:27).

충동질을 하되 그는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생각(29절)과 거짓말(18:13)로

목회자를 비방하며 대적하여(12절) 그들로 하여금 분노케 만들어서(19:28)

결국에는 교회 안에 아무 이유도 없는 소란을 일으켜 불법 집회를 가집니다(19:40, 21:30).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불법 집회에 모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왜 모였는지조차 모르고

저마다 떠들어대서 교회 안이 야단 법석입니다(19:32, 현대인의 성경).

교회 안에서 은사로 말미암아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로 말미암아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4가지라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우리가 받은 은사는 주님께서 “은혜대로” 주셨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2) 둘째로,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3) 셋째로, 우리가 은사를 분수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 것,

(4) 넷째로, 은혜로 받은 은사를 교만한 마음으로 사용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잘난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받은 선물이 각각 다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수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낮고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십시오. 

스스로 잘난 체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2장 6, 16절).

 

 

 

교회에 봉사할 일이 많아 분주하면 뭐합니까?

 

 

교회에 봉사할 일이 많아 분주하면 뭐합니까?

주님에게까지 불만과 불평을 하면서 ...(눅10:40)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기 보다(41절) 주님 보시기에 더 좋은 편을 택하여

한 가지만이라도 하는게 낫지 않나요?(42절)

그 한 가지는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39절).

교회에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평안함과 든든히 서 감과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님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행 9:31).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은사를 주셨것만(고전14:3, 4, 5, 12, 26)

왜 우리는 "자기의 덕"(4절)을 세우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령

 

 

우리가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주님의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령이 없습니다

(시 51:12).

 

 

굳게 믿지 않으면

 

 

만일 당신이 굳게 믿지 않으면 당신은 굳게 서지 못합니다(사 7:9).
당신이 굳게 서 있지 못한 이유는 당신이 굳게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굽어살피시는 하나님

 

우주의 관점으로 볼 때 지구는 지극히 작은데,
그 지구에 살고 있는 나는 개미보다도 작을텐데 ...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나는 티끌보다도 작을텐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나 같은 존재도 굽어살피시고 계시니(시편 33:13-15)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사랑인가 ...

 

 

궁핍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결과로 우리로 하여금 궁핍함을 겪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사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사기 7장 특히 6절을 묵상하면서).

 

 

궁핍하다는 것이

 

궁핍하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 (눅 15:14, 17)

권고를 듣지 않는 이유?

 

 

 

미련한 자가 권고를 듣지 않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바른 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잠 12:15).

 

 

 

권리 포기?

 

 

 

나의 권리도 쓰지 않고 범사에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 9:12).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목적

 

우리는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쓰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참아야 합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9:12).

지금 혹시 우리는 참지 못하고 우리 권리를 남용하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있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세상에서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형제/자매,

적어도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는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고전 12:24)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자녀들은 하나님을 생명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합니다.

("귀한 며느리" (룻기 4:15) 말씀 묵상을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적용해 본 것임 )

 

 

 

 

귀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벧전 3:7).

균형을 잃은 삐뚤어진 자아성찰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 거울에

제 자신을 비춰보는 반영(reflection)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거울에 반영된 제 자신의 모습을 직시(confrontation)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진 제 모습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제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거울에 비춰진 제 자신의 죄악된 모습만을 보면서

그 모습으로 인해 극심한 낙심과 자책감과 죄책감과 자괴감 속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제 눈으로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의 한계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인해 계속해서 더 많이 들춰지는 범죄들입니다(롬5:20상).

이것은 삐뚤어지고 잘못된 자기 성찰(introspection)입니다.

잘못된 자기 성찰은 자기의 눈으로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자기 성찰은 나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나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사해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올바른 자아성찰(self-examination)은

나의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히12:2).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인해 계속해서 더 많이 들춰지는 범죄들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 모든 범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복하여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더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롬5:20하).

그러므로 그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고전15:10).

 

저는 더 이상 삐뚤어진 잘못된 자기 성찰(introspection)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균형있는 올바른 자아성찰(self-examination)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의 눈으로 제 자신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의 눈으로 제 자신을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제 자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사43:4, 현대인의 성경).

 

[참고: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dont-be-introspective-examine-yourself/]

 

 

그 가증한 일을 알아야 할텐데 …

(에스겔 16:2)

 

 

하나님께서 아주 아름답게하시되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하시므로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명성이 온 세계에 퍼진 것인데(9-14절),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 명성을 이용하여 창녀짓을 하며 

지나가는 자들과 음행했습니다(15절).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금은 보석으로 남자 우상들을 만들어 그들과 음행하고 

그 남자 우상들 앞에 기름과 향과 여러가지 향기로운 제물을 받쳤습니다(18-19절).

그런데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창녀짓을 하고서도 부족하여 

자기의 자녀들도 우상에게 제물로 받쳤습니다(20-21절).  

또한 그녀는 우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광장에 사당을 세웠습니다(24절).

그녀는 지나가는 모든 자에게 몸을 바쳐 아주 난잡하게 음행하였습니다(25절).

그녀는 음란한 이웃인 이집트 사람들과 음행하였는데(26절) 

그녀는 음욕이 차지 않아서 앗시리아 사람들과도 음행했고(28절), 

그것도 부족하여 상업이 나라 바빌로니아 사람들과도 음행을 했습니다(29절).

그녀는 뻔뻔스러운 창녀처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정말 타락한 여인입니다(30절).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낯선 사람과 간음하는 음란한 아내입니다(32절). 

보통 창녀는 화대를 받는데 그녀는 그녀의 모든 연인들에게 선물을 주고 뇌물까지 주어 사방에서 그녀에게 몰려들어 그녀와 음행하게 했습니다(33절).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창녀와 다릅니다. 

그녀는 화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기 때문에 다른 창녀와 같지 않습니다(34절).

 

그런데 이러한 여인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창녀짓을 못하게 하겠다. 

네가 다시는 연인들에게 화대를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절).

비록 그녀는 자기가 행한 음란과 더러운 일에 대해서 그 댓가를 치러야 하겠지만(58절)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녀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0절).  

당연히 그 언약을 그녀가 먼저 파괴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파괴하셔도 되셨을텐데도 오히려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하나님을 하나님인 줄 알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62절).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행한 모든 일을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3절).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리도 가증한 일을 행한 창녀를 용서하실 수 있으신 것일까요?

 

지금 신부된 교회는 신랑되신 예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녀짓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 것들로 우리 자신의 음욕을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음욕이 만족되지 않으니까 지금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행하는 불의는 참으로 타락한 여인보다 더한 가증스러운 죄들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는 음욕외에도 탐심을 만족시키고자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들을 행하기에 담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되신 주님은 우리와 맺으신 영원한 언약에 충실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가증한 일들을 행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가증한 죄들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신부된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엡5:27)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마16:18).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신부된 교회는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과 섞지 않는 강한 몸을 입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계19:9).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잠 23:17, 24:1, 19; 참고: 시 73편).

오히려 우리는 의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자요(빌 3:10)

그 고통을 통해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들입니다(창39).

그 관계를 멀리하게 만드셔서라도?

 

이성 관계이든 부부 관계이든 부자/모녀 관계이든,
그 관계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보다 더 가까우면
하나님께서는 그 관계를 멀리하게 만드셔서라도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나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참고: 창 22장).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멀리하시기까지

우리를 가깝게 하셨습니다.

 

 

그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은 용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본능대로 살지 말고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눅 6:37; 마 5:44).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능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능력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 여러분이(우리가)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여러분(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빌 2:13).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게하시므로 (갈 5:22)

우리의 본능을 뛰어넘어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케 하십니다.

용서하며 사랑하는 삶에는 신적인 기쁨이 있습니다(시 90:14).

그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때와 다른 이제는 ...



 

우리가 옛 사람이었을 때에는

우리의 몸은 죄의 몸이었고 우리는 죄에게 종 노릇을 했었습니다(롬 6:6).

 

그 때에는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였고 우리는 몸의 사욕에 순종했습니다

(악한 욕망을 따랐습니다)(12절).

그 때에

우리는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었습니다

(죄의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13절).

우리는 우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습니다(19절).

 

그 때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었고 죄가 우리를 주장(지배)하게 했습니다(14절).

 

그 때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16절).

 

한 마디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7:5).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엡2:15; 골3:10).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롬 6:14, 15).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얻게하시려고

율법 아래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갈4:4-5)의 몸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말미암아)

이제(롬 6:21, 22)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7:4).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6:2-4).

이제

우리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던 죄의 종이 아니라(20절)

죄로 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종이요(22절) 순종의 종이요 의의 종입니다(16-18절).

 

이제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6절).

"이것은 그리스도께 죽은 사람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얽매였던 율법에 대하여 죽고

거기서 해방되었으므로 성령님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있습니다(7:6).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선을 행하길 원하는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십니다(롬7:18; 빌2:13).

 

한마디로,

이제는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롬 6:22).



[어제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을 통하여 로마서 7장 1-6절 말씀을 들은 후]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대하 32:25).

 

 

 

 

그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우리가 수고하지도 않았는데(수 24:13; 욘 4: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은(수24:20)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자들의 신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20절).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지요

 

 

자기 집과 친척과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자라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지요.

(참고: 막 6:4)

 

그 사람을 믿지 않는 이유?

 

 

우리가 그 사람을 믿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속에 역사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보다(빌1:6)

그 사람의 부정적인 과거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행 9:26과 문맥).

 

 

그 사람이 바로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나를 속이고 나서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하는 그 사람,

속임수로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미친 사람입니다

 

"자기 이웃을 속이고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자는

횃불을 던지고 활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과 같다.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잠 26:18-19, 현대인의 성경).

 

 

그 위기에서 건져내시는 주님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되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이나 아무 허물도 없는 자를 시기하여

그를 위험에 빠트리고자 고치지 못하는 인간 규례를 만들어

그 규례에 걸리게 만들어 그 사람을 위기에 몰아 넣지만

결국 그가 충성되이 섬기는 주님께서는 그를 그 위기에서 건져 내십니다(참고: 단 6장).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에게 향하는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십니다(신 23:5).

 

 

 

그 행위가 드러날까봐

 

악을 행하는 자,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에

빛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봐 그렇습니다

(요 3:19-20; 엡 5:11, 13).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

 

 

의도하지 않았는데 부지중에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그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죄를 깨달아 죄를 죄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있게 내 죄악된 모습을 직시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참고: 레위기 4: 13, 14).

그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여 그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잠 5:3, 8).

그렇지 않으면 두렵건데 우리는 잃어버리게 될 것이요

빼앗기게 될 뿐만 아니라(9절)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11절).

 

우리는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18절).

우리는 그녀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해야 합니다(19절).

 

 

 

"그래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래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민 14:41-45).

왜 이렇게 주님의 종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혹은 믿는) 이유가 예수님 외에

물질의 축복이나 자녀의 축복이나 건강의 축복이나 등등 하나님께 원하고 기대하는 축복때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그 모든 축복들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욥 1:9-12).

 

그래도 과연 우리는 욥처럼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20-22절)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전 8:15, 현대인의 성경)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인 이 세상입니다(전 2:23).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24절, 현대인의 성경; 3:13, 22; 5:18; 8:15),

또한 사람이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3:12).

이것은 사람의 그 사람의 몫이요(22절; 5:18)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2:24), 하나님의 선물입니다(3:13).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즐실 수 있어야 한다"(8:15, 현대인의 성경)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9).

 

 

 

 

그러나 진리 안에 갇힌 자는

 

 

상황 안에 갇힌 자는(출14:3)

환경에 지배를 받아 두려워하며 원망합니다(10-12절).

 

그러나 진리 안에 갇힌 자는

말씀의 지배를 받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합니다(13-14절, 시 43:5).

 

그릇된 가치관

 

 

우리는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릇된 가치관이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사53:3).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슬픔과 질고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3절).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슬픔(비애)의 사람이셨습니다(3절). 
또한예수님은질고를아는분이셨습니다(3절). 

즉, 예수님은 질고에 익숙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도 그리고 질고도 싫어하므로 

얼굴을 그것들로부터 돌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안락함과 평안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싫어하며 멸시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그릇된 가치관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요일2:16).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했을 뿐만 아니라 먹음직도 했던 것처럼(창3:6)

우리의 그릇된 관점에서 세상에 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보암직 할 뿐만 아니라 먹음직한 이유는 육신의 정욕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가치관을 버리게 하고

오히려 순간적인 가치관을 택하게 만듭니다. 
육신의 정욕은 무엇이 참으로 귀하고 무엇이 하잖은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헛된 것들을 먹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관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점이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사 53:2). 
즉, 우리의 그릇된 관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빌1:6)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못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순종의 관점으로 순종을 바라볼 때 
우리는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관점은 
하와아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했다는 말씀을 생각할 때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창3:6). 
분명히 선악과는 순종의 관점으로 볼 때 
보암직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였는데 
하와의 관점에서는 보암직한 것을 보면 
그녀 마음에 순종의 미보다 불순종의 추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안목의 정욕(요일2:16)에 이끌려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엿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릇된 관점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그릇되게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

 

 

우리는 그릇된 생각을 합니다(사 53:4). 
 우리의 그릇된 생각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5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4절).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시고(4절)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건만 
우리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며(신성모독죄)

성전을 모독한 죄로(성전모독죄)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분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생각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우리의 생각을 삐뚤어 놓습니다.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것입니다(창 3:6). 
이것을 사도 요한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일2:16).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로서 좆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요일2:16). 
이렇게 이생의 자랑은 그릇된 생각을 하게 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리도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참 달콤한 것 같다.

그 달콤한 맛을 들이다보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영광을 받고자 애쓸 것 같다.

그러다가 그 맛에 중독이 되면 분명히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상상을 해 본다.

내가 사람들의 노예가 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을 받고자

별의 별 짓을 다하는 추한 모습으로 살다가 무너지는 모습을 말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이 생각난다.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작게 여겼던 사울인데(삼상15:17)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아막렉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12절).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까지 말이다(3, 8-9절).

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아말렉 사람들의 소유물을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는(19절)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30절)

그는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여 달라(30절)고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고(27절) 애걸하였다. 이 얼마나 추한 모습인가.

그리도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면 받을 수록 더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일까?

소유욕도 위험하지만 참으로 명예욕도 매우 위험한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 보기에 영광스러운 명예가 있으면 뭐하나?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건만.

장례 예배 때 사람들 보기에 영광스러운 이력서(조사?)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인생을 헛된게 허비하면서 살라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닌데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자: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요8:54).

만일 내가 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54절, 현대인의 성경).

잊지 말고 기도하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115:1).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야 합니다

(고후 2:14-1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영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골 1:9, 현대인의 성경).

 

순종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길 원합니다(24절).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은(롬8:35) ...

 

우리 대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다 받으시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랑입니다(34절).

우리를 의롭다하시고자(4:25) 다시 살아나신 사랑입니다(8:34).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사랑입니다(34절).

 

"하나님의 사랑"은(39절)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사랑입니다(32절).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원로 목사님의 수요기도회 설교 중에서]

 

 

 

그리스도의 편지, 나의 편지

 

 

 

'당신은 나의 편지입니다.

나는 당신을 내 마음에 썼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을 내 마음에 쓰셨습니다.'

(고후 3:2-3)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주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빌 2:8; 사 53:2).

 

 

 

그리스도인의 큰 불행?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엡 1:3)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큰 불행입니다

(전 5:16, 19; 6:2).

 

 

 

그리하면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우리 마음을 주님께 향하여

주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삼상 7:3).

 

그만큼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

 

 

지금 필요한 것은 200 데나리온의 떡인데(노동자 한 사람의 200일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

있는 것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명철로 생각할 때 남자만 5,000명을 결코 먹일 수 없는 양의 음식이지만

그 음식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 있을 때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감사)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로 하여금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12 바구니에 차게 남았습니다(막 6:30-44).

 

비록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할 만큼이 내게는 없지만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믿음으로 주님께 다 받칠 때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감사하시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아(엡1:3) 
복 있는 자들이 된 것은(신 33:29)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2:8-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갈3:13-14).

(Dennis E. Johnson의 "JOURNEYS WITH JESUS:

EVERY PATH IN THE BIBLE LEADS US TO CHRIST"를 읽으면서)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있는 자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있는 자는(욥 6:10)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운(3절)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이 있되

저울에 모든 놓을 수 없을 정도이고(2-3절),

식욕을 잃어서 음식 맛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은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지고 먹을 것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지경"이며(6-7절, 현대인의 성경),

아무 기력도 없어서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어서 참고 기다릴 수도 없으며

(11절, 현대인의 성경; 7:6),

"완전히 무력한 자가 되"어서(6:13, 현대인의 성경),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아

"이 길고 지친 밤을 외롭게 보내"고 있으며(7:3, 현대인의 성경),

"내 피부는 전신에 구더기와 부스럼으로 뒤덮여 있고

내 삶은 곪아 터지고 있"으며(5절, 현대인의 성경),

"행복할 날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녀는 침묵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며

자신의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합니다(11절).

그/녀는 잠자리에서나마 자신의 고통을 잊어 보려고 하지만

악몽으로 시달립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녀는 "이런 몸으로 삶을 계속하느니보다

차라리 숨이 막혀 죽기를 원합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사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내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내 삶은 무의미합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녀를 소중히 여기셔서

많은 관심을 쏟으십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는 "잠시 동안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19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십니다(18절).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녀는(6:10)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혀 있"다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두려움이 물밑듯이" 그/녀에게 엄습해 오고 있다고 느낌니다

(4절, 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주님께서 자기를 악몽으로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7:14,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이 내 생명을 끊어

나를 기꺼이 죽여 주셨으면 줗으려만!"합니다

(6:9,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절).

 

어떻게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위로를 받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10절).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란?

 

 

예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받으신 하나님의 위로는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케 하신 것입니다

(시 22:1; 23:4; 사 53:11; 마 27:46)

 

우리가 극심한 고통 중에서 (심지어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는

죽기까지 주님께 순종하므로 주님을 만족케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만족케 해드림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있길 기원합니다.

 

 

 

금해야 하는데 … ㅠ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금하지 않고 있는 아버지,

아는 죄악으로 인한 결말은 ...?

(삼상 3:13)

 

 

급한 마음

 

 

미련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고
사람에겐 급한 마음으로 화를 냅니다.
(전 5:2; 7:9)

 

 

 

긍휼, 전념, 자족

 

 

 

금년 2015년 한 해를 뒤돌아 볼 때에

나 같은 큰 죄인에게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할 뿐입니다(딤전1:13).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셨습니다(16절).

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나 같은 죄인에게도 "직분"을 맡기신(12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생각할 때에(14절)

저는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나누는 일에 "전념"하길 원합니다(4:13).

저는 말씀에 "부한 자"가 되어(6:17)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을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싶습니다(18절).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길 기원합니다(6절).

제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기에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길 원합니다(7-8절). 

 

새해 2016년도는

하나님의 긍휼에 힘입어 맡은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 전념하여 그 말씀을 나누는 것을 더욱더 좋아하며 즐기면서,

주님 한분만으로 자족하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

 


  1.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습니다(시59:17; 벧전2:10).
       그/녀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당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사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시51:1).


  1.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눅17:4).
     그/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기에 그 또한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마9:36, 18:33; 빌1:8).
       그/녀는 죄로 말미암아 허덕이는 사람의 죄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미워하지만

   그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우며 섬깁니다.


(Iain M. Duguid, " Hero of Heroes"란 책을 읽으면서)

 

 

 

기가 막힙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들을 보면(들으면)

기가 막힙니다(에스라 9:3, 4).

기도 응답 받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세로 탐욕과 의심을 품고(시 78:18, 19)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에는(29절)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며 하나님의 행하신 기도 응답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날들을 헛되게 보내게 하실 것이기에(32-33절)
우리는 탐욕과 불신으로 드린 기도를 응답 받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 받는 이유?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에게서 받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22).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인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명목아래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야 겠다(참고: 잠 11:13, 20:19).

기도 중에 나 자신이 변화를 받습니다.

 

기도 중에

자신이 변화를 받습니다

(행 10:9-16; 11:4-10).

 

기도 후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만남이 있습니다

(10:17-23; 11:11-12).

 

주님의 인도하심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만난 사람에게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0:23-48; 11:12-17).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

 

그런 후 하나님을 기다리면 어떨까요?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 (2x) (9절)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면 어떨까요? (9절).

기도를 좀 바꿔보는게 어떨까요?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시길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고후12:8)

어쩌면 내게 고통을 주신(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롬 12:2)를 여쭈면서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도 사용하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는게(8:28) 훨씬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습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데로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기도하는 습관,

즉 우리의 뜻대로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 26:39).

 

 

 

기도하면서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마십시다 (눅 18:1).

포기하지 말고 끈기있게 믿음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드온의 죽음 후 ...

 

사사 기드온이란 죽으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은

다시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이 않았으며,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기드온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았습니다(삿 8:33-35).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므로

인내하게하며 위로를 준다는 것입니다(롬 15:4).

그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5, 13절).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입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입니다(행 13:28-29).

기쁨을 돕는 자

 

 

믿음에 서 있는 형제, 자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고후 1:24).

 

 

 

긴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긴 고난을 통하여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는 것을 배웁니다

(사 10:20).

 

 

 

 

깊이 생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자녀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깊이 생각하시며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렘31:20).

"까닭 없이"?

 

넘치는 소유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지 않나요?

(욥 1:9-10)

 

 

 

깨달은 후에야 견고할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

우리 가정과 교회는 견고할 것입니다

(참고: 단 4:26).

 

 

 

 

 

깨달음으로 깨지고 싶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롬5:5)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엡6:17)

제 양심을 계속해서 찔러주시며(행2:37)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렘23:29)

제 강팍한 마음을 계속해서 부서트려 주시며

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렘23:29)

제 냉랭한 마음을 계속해서 녹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막 13:33, 34, 35, 37).

그 이유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3절).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35절).

주님이 홀연히 오셔서

우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36절).

 

 

꼭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배워야 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자족의 비결'(the secret of being content)입니다(빌 4:11-12).

어떠한 형편에든지, 즉 풍부할 때에든지 궁핍할 때에든지

우리는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풍부할 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자족하면서

은혜로 주신 풍부함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궁핍할 때에도

원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꾸며낸 겸손"

 

 

"꾸며낸 겸손",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는 것 ...

(골 2:18)

 

 

끝까지 편애?

 

아버지 야곱은 끝까지 편애했습니다.
그는 12 아들들 중 요셉을 더욱 사랑해서
요셉이 17살 때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창37:3)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요셉에게 
세겜 땅도 그의 형제들보다 더 주었습니다(48:22).

 

 

끝나게 하실 것입니다.

 

 

교만한 죄의 결과를 다 알면서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않고,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계속해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끝나게 하실 것입니다

(참고: 단 5:22-23, 26).

 

 

칼이 내 마음을 찌르듯 해야 할텐데 ...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엡 6:17)

우리의 마음을 찌르듯 하여

우리 마음의 생각을 드러냅니다(눅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