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하는 사람들
(The Obedient People)
[사도행전 5장 17-32절]
“순종”(obedience)란 말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 "순종(obedience)"이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는 "듣는다(hear)"라는 뜻입니다. 그런가하면 영어의 "고집불통(absurd)"이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는 "귀머거리(deaf)"입니다. 순종의 삶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삶이요, 고집 불통의 삶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먹은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인터넷). 디트리히 본회퍼는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다(Only those who obey can believe, and only those who believe can obey).” 믿음과 순종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말 만하고 행동이 없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인터넷). 순종은 믿음의 표시입니다(Obedience is the expression of faith).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또한 속히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절대 복종을 하고 있습니까? 리처드 포스터는 “심플 라이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질에 우선순위를 두는 순간, 철저한 순종은 불가능하게 된다’ (인터넷). “오늘날은 부(富)의 우상숭배가 판을 친다. 안식일에 쉬라고 명한 제4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시대다. 좀더 일하면 모든 사람을 앞지를 수 있는 상황에서 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 짐을 내려놓는 자유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다. 탐심의 금령은 제10계명으로 죄의 한복판에는 내면의 소유욕이 있다. 소유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과도한 욕심, 내면의 강박, 무절제한 욕망은 죄다. 문제는 알코올 중독자들처럼 우리도 일단 병(病)이 우리를 삼키면 그 병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인터넷). 구약에서 얻은 단순성의 통찰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 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긴급대책을 세우거나 조건이나 구실을 달지도 않았습니다.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삶은 한 가지 진리를 배웠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순종’이야말로 단순한 삶이 흐르는 도관(導管)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29절을 보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We must obey God rather than men). 저는 오늘 “순종하는 사람들”이란 제목 아래 과연 순종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듣고 행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19-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 이 말씀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충만한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가운데(12절) “허다한 사람들”이 병도 낳고 귀신들린 자들도 나음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었을 때(16절) 믿고 주님께 나오는 자가 더 많아져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5:14). 이 때에 성령충만한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사탄의 역사는 오늘 본문 17절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에 가득한 시기로 인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18절).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로부터 심문을 받은 것을 우리는 묵상했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묵상한 바로는 이 종교지도자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던 이유는 이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하고 분노를 자극했던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유상섭): (1)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권세가 전혀 없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친 것과 (vs.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2)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하였기 때문임 (vs. “사두개인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 종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심문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 모든 사도들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렇게 한 마음의 동기를 “시기”(jealousy)라 고 저자 누가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기 혹은 질투에 대한 유대인의 민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이동원, “회개행전”, p.34):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친구 한 사람에게는 너에게 주는 축복보다 갑절 더 많은 축복을 주겠다. 그런 친구가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갑자기 자기가 질투하고 있는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천사님, 저에게 주실 축복을 갑절이나 더 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천사가 ‘그럼 너에게는 어떤 축복을 주기 바라느냐?’고 했더니 이 여자는 ‘제 눈을 하나만 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 결국, 자신의 눈 한쪽을 잃게해서라도 질투하는 친구의 두 눈을 다 멀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들이나 질투해 보신 경험 있지 않습니까? 마치에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동원 목사님 말씀대로 (1) “질투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제한시켜 버리는 죄악”이며 (2) 또한 “질투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다 빼앗아버리는 죄악”입니다.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질투하는 대상 외에는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듬니다. 결국 질투하고 있는 내 자신이 변질되어가는 가운데 쇠락해가며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투” 혹은 “시기”는 무서운 죄악의 열매를 맺게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질투/시기라는 것을 그저 단순한 심리적 감정으로 봐야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 이유는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 즉 성경 용어로 말하자면 “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이동원). 그러므로 질투/시기하는 사람은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그들의 시기의 대상인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을 다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심문과 달리 제2차 심문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19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사자가 사도들에게 주신 명령은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20절). 이 명령의 사도들의 반응은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였습니다(21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날 “밤”에 주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사도들은 그 다음 날 “새벽”에 집으로도 향하지 않고 곧장 성전에 들어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자의 이적 역사로 자유의 몸이 된 사도들, 주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디모데후서 2장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주님의 사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므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 사자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습 속에서 생명의 말씀에 메인바 된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메인바 되어 그 말씀을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을 속히 듣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메인바 되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재리와 염려에 메여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합니까 아니면 미루다가 불순종합니까?
둘째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26절을 보십시오: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서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 함이러라.” 주님의 사자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된 사도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의회를 모으고 적극적으로 사도들을 취체하려고 그들을 잡아오라고 사람을 옥으로 보냈습니다(21절). 그런데 관속들이 옥에 들어가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도 문에 서있었으나 사도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22-23절). 이 보고를 들은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24절, “의혹하여”는 진정한 번역 (박윤선)]. 근데 다른 사람이 와서 이들에게 고한 소식은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였습니다(25절). 그 소식을 들은 성전 맡은 자는 관속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서 사도들을 잡아왔지만 강제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26절).
이 얼마나 흥미로운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을 두려워하므로 성전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던 사도들을 강제로 잡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충만한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예루살렘 많은 백성들이 주님께로 나왔던 반면에 시기로 충만했던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을 대항하고자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21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시편 2편1-2절 말씀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지도자들과 세상의 군왕들, 그들의 경영, 즉 합동작전은 헛된 것이였습니다(행4:25-27).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대적하는 종교지도자들의 경영 또한 결국은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유상섭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들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합심 기도대로 이들의 위협을 돌아보신 결과이다(4:29)” (유상섭).
지혜자는 잠언 29장25절에서 이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들에게서 안전을 찾으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안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책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의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을 두려워하는것에 사로잡혀 있게 되었노라고 시인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잠29:25)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레 입증하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자기 활동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의 반응을 더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올무가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반응만을 의식할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로부터 자유케 된다. 이것이 자유이고 이것이 해방이다! 커다란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도우슨).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반응만을 의식합니다. 주님의 사자의 부르심(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볼 때 사무엘상 15장2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같이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낮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 즉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3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산헤드린 공회에 서게 된 사도들은 대제사장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느냐(28절)라는 질문에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답변하는 것을 오늘 본문 29절에서 3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답변은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미 사도행전 4장19절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의 1차 심문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을 시기하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2) 둘째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지금 사도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모인 모든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족속들의 원로들 앞에서 “너희가” 예수님을 나무인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고 선포하면서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선포하였음. 그런 후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의 목적이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람을 얻게 하시려고”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님이 그들 안에서 증거하시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20절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증인의 삶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니.” 예수님의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전합니다.
우리가 훌륭한 증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훌륭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필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네비게이토 총재를 지낸 귀한 리로이 아임스란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 인내하라. 처음에 성공하지 못하면 계속 다시 시도하라. 포기하기에는 항상 너무 빠른 법이다. (2) 친절히 대하라. 귀찮은 존재가 되면 안 된다. 그들을 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얻어야 합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순종하라. 성령께서 일하시는 통로로 당신 자신을 내드리라. (4)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분명한 말을 사용하라. (5) 다섯째로, 복음에 합당한 경건한 삶을 살라. 당신의 삶을 보고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참됨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인터넷).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헨리 & 리처드 블랙커비는 “하나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란 책에서 “순종은 생명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처음집례한 장례식은 어린 꼬마의 장례식이었다. 우리 교회 한 부부의 첫아이였고, 조부 모에게는 첫 손주였다. 어느 날 그 집에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아이는 부모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오라고 하면 갔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섰다. 부모는 그런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귀여워했다. 하루는 그 집 앞마당 문이 열려 있었다. 딸아이가 마당을 빠져나가 길 쪽으로 가는 것이 부모 눈에 띄었다.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딸아이는 주차해 둔 두 대의 차 사이로 빠져나가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안돼! 돌아와!” 부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린 딸에게 외쳤다. 아이는 잠깐 서서 부모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돌아서서는 달려오는 차 쪽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차는 아이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부모의 통곡은 그야말로 단장(斷腸)의 비애였다. 그것은 한 아이가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 반드시 즉각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주님의 명령에 겸손히 순종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