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위의 것을 찾으십시다!
[골로새서 3장 1-4절]
여러분은 우리 주님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을 확실히 받을 줄 확신하십니까? (새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후렴)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연결)되어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요일1:3).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데(벧후1:4)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요 3:36; 마 22:37, 39). 이렇게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들로서(빌3:20) 하늘나라에서의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하므로[이것이 바로 현재에 구원을 이루는 삶임(2:12)]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봅니다. 그러면서 비록 지금 우리가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영생의 축복인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가사처럼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을 늘 편한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1절과 후렴)라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찬양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음. 영어(NASB) 성경인 “keep seeking the things above”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어 성경 번역을 설교 제목으로 삼고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4절 말씀을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계속해서 찾으라(골3:1)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계속해서 찾는다’란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소풍을 가서 ‘보물 찾기’ 게임을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선생님들이 먼저 몰래 꼬깃꼬깃 접어놓은 보물들을 나무 가지에나 바위 틈에나 여기 저기 숨기셨습니다. 그런 후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보물을 찾으라고 하면 우리 학생들은 그 보물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찾으면 매우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보물 찾기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장 44절이 생각났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감추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고대 유대인들은 귀한 보물들을 땅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가장 안전한 곳이 땅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 속에 묻어두면 언젠가는 자손들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여러분은 무엇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찾고 계십니까? 적어도 우리는 매일 순간 순간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그 물건을 찾고자 애쓰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든지 또는 전화기나 지갑이나 신용카드 등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자 부단히도 노력하곤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건강을 잃었을 때에는 다시금 건강을 찾고자 매우 애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마태복음 7장 7-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 아버지께 문을 두드리듯이 구하고(기도하고) 찾으라고 하신 말씀으로서 우리가 기도하고 찾는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1절).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가 무엇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찾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의미는 ‘내가 하나님께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내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우리가 이미 묵상한 골로새서 2장 8-23절에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한 4개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즉,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1) 영지주의(8-10절)나 (2) 율법주의(11-17절)나 (3) 신비주의(18-19절)나 (4) 금욕주의(20-23절)를 찾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1) 오히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헛된 높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나, (2) 하나님의 의보다 사람의 의를 추구하고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종 노릇하게 만드는 율법주의나, (3) 천사 숭배나 환상을 통한 특별한 체험으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신비주의나 (4) 자신의 육체를 벌함으로써 정신을 정화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금욕주의를 찾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찾다’(to seek)라는 원어 헬라어의 의미는 “추구하다, 노력하다, 시도하다”로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간절함과 근심의 생각으로 노력하고 추구함을 의미합니다(WSNTDICT). 여기서 근심의 생각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간절함으로 노력하고 추구한다는 의미를 생각할 때 저는 골로새서 3장 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즉, 우리가 위의 것을 계속해서 찾기 위해선 우선 우리는 위의 것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지 말고 찾지 말아야 할 “땅의 것”은 무엇일까요?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땅에 있는 육체의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란과 더러운 짓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지나친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땅의 것”(2절)은 “이 땅에 있는 지체”로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5절)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 육체에 남아 있는 죄를 의식적인 노력으로 죽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맥아더). 바울은 이미 골로새서 2장 11, 13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전에는 죄와 할례받지 못한 육적인 욕망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육적인 죄의 몸을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죽었기에(3:3) 거듭난(중생한) 새 사람으로서 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절)고 권면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라[“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라(현대인의 성경)]고 권면했습니다(2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했습니다(1절).
저는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 중에 “찾으라”는 단어를 묵상할 때 시편 42편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시여,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마치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그의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했는데 우리 또한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특히 이 땅에 살면서 낙망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위기를 주님을 찾는 기회로 삼아 갈급함 심령으로 주님을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위의 것”(the things above)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마 많은 성도님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란 찬송가를 좋아하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 찬송가를 좋아함. 특히 저는 2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제가 이 2절 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비록 제가 괴롬과 죄가 있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저는 “빛나고 높은 저 곳”인 하늘 나라를 날마다 바라보며 살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송가 3절도 좋아합니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에 관한 히브리서 11장 1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하늘이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한 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한 성”이란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에게(2:1) 계속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으라”(3:1-2)고 권면했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1, 2절)을 보면 개역개정 성경에는 “위의 것”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지만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1절에 “위의 것”이란 단어와 2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란 단어가 각각 나옵니다. 원어 헬라어를 보면 두 단어가 다른 단어가 아니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개역개정 성경이 번역한 대로 “위의 것”이라도 두 단어를 똑같이 번역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왜 현대인의 성경은 동일한 단어를 “위의 것”이라고 둘 다다 번역하지 않고 2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을까 라는 의문이 좀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늘에 있는 것”이라는 번역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의 근거는 첫째로 골로새서 3장 1절 하반절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여기서 “거기는”이란 바로 “위의 것”(1, 2절)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1절). 제 생각의 두 번째 근거는 요한복음 8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위에서 났”다(I am from above)고 말씀하시면서 그 위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I am not of this worl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above)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또는 ‘다가오는 세상’으로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개역개정) 또는 “하늘의 예루살렘”(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2장 2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위의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주기도문이 생각났습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9-10).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 말씀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위의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이란 2가지라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나라가 임하시오며”)와 (2) 하나님의 뜻(“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위의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인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위의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은 “하늘 나라”(천국)(마3:2, 현대인의 성경)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위의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주기도문을 보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그 하늘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간구하신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26:39, 새 번역).
우리는 계속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골3:2)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1절). 우리는 계속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늘 나라”(천국)(마3:2, 현대인의 성경)인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주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으로서 우리는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마22:37, 39). 그리할 때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마6:10).
마지막 셋째로, 성경은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와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길 기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10절, 26:39). 이렇게 우리가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고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를 주실 것입니다(6:33).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으면서 살 것입니다(34절).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에게(2:1) 계속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했냐면 우리는 계속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고 교훈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주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의 뜻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1) “왜 우리가 위의 것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는가?” 와 (2) “우리가 위의 것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 바울은 이미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란 옛 생명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에 대한 부활의 경험을 상징합니다. 로마서 6장 3-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힌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도 함께 죽었다면 그분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도 틀림없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이미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살린바 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나 라오디게아 성도들이나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이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옛 사람(옛 생명)이 아니기에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2절) 땅에 있는 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 답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2절) 또한 위의 것을 찾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절).
(2) 둘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 외에도 로마서 8장 34절과 히브리서 1장 3절과 8장 1절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우편”이란 비유의 말씀으로서 하나님 우편 또는 하나님 오른편이란 권세 또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사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권세 또는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김창세). 사도 바울은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고 말씀하였는데 여기서 “거기는 “위”(1절)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위”란 바로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앉아 계시느니라”고 말씀했는다(1절) 저는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에베소서 2장 5-6절이 생각났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현대인의 성경)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앉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빌3:20상).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우리는 하늘 나라 시민권자로서 위의 것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위의 것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4절 말씀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생명”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Believer’s 성경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에 대하여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느니라”(요14:17)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절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사람이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의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Believer’s 성경 주석). 그러므로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우리는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빌3:20).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3:4,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이 믿음의 소망을 가진 우리는 계속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