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사무엘하 16장 12절).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저주의 나무(신21:23)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신성모독 죄(마26:65))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는 영원히 저주받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저주의 나무에 죽으실 아무 이유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돌이켜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신23;5, 느13:2, 엡1:3ff).  이 영생의 축복과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까닭 없는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며 심지어 저주를 받을지라도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선 우리는 신뢰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신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6장 12절을 보면 다윗은 아비새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11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네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한 2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원통함을 감찰하십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혹시 요즘 고통 거리가 많지는 않으십니까?  인생은 가시덤불처럼 이런 저런 고통거리들로 이리 저리 엉켜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염려와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서 이런 저런 병이 걸려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가시덤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엉키고 엉켜서 우리들의 마음을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러한 생각도 들곤 합니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는가?’  참으로 가시덤불과 같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때 저는 그 원인을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원인은 세상과 걱정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입니다(마13:22).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세상적인 유혹에 빠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이런 저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엉키고 엉켜서 괴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엉킨 것들을 우리 힘으로 풀어 보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더 엉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시편142편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가시덤불처럼 이런 저런 고통거리들이 엉키고 엉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시편 142편 2절을 보면 알 수가 있음: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현대인의 성경) “내가 억울한 사정을 주 앞에 털어놓고 나의 모든 어려움을 주께 말합니다”].  여기서 “내 원통함”이란 히브리어 원어로 “시아크”인데 그 단어의 뜻은 “덤불”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 “덤불”이란 말은 다윗의 삶에는 고통거리들이 한 둘이 아니어서 가시덤불처럼 얽혔으므로 질식할 지경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왜 다윗은 이렇게 질식할 지경에 놓여있을 정도로 고통 거리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까?  그 이유는 다윗은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박윤선).  핍박을 받되 사울 왕은 다윗의 행하는 길에서 그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겨 놓기까지 하였습니다(3절).  결국 사울 왕은 다윗의 생명을 끊으려고 찾고 있었습니다(삼상18-24).

 

오늘 본문 사무엘하 16장 12절을 보면 인생의 큰 위기를 겪는 다윗이 나옵니다.  그 큰 위기란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11절).  그래서 다윗은 모든 가족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들과 함께 즉시 예루살렘 성을 떠나 도망가고 있었음(15:14-16).  흥미로운 점은 다윗이 도망갈 때에 다윗 왕 앞으로 행진한 사람이 600명이였다는 것입니다(18절).  이 600명이라는 숫자가 흥미로운 것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도망 다닐 때에도 그와 함께 했던 숫자가 600명이였기 때문입니다(삼상23:13; 27:2; 30:9).  이 동일한 숫자가 우연이였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함.  왜 성경 저자가 다윗이 사울 왕에게 도망 다닐 때나 압살롬에게 도망갈 때나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숫자가 동일한 600명이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도망갈 때에 가드에서 그와 함께 온 600명의 군인들은 다윗으로 하여금(아니면 적어도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거에 사울 왕에게 도망 다니던 다윗을 회상하게 만들기 위해서라 생각합니다.  그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가 예루살렘 왕궁에서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의 남편인 충성된 군인 우리아를 죽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기 전인 사울 왕에게 도망 다니던 시절을 기억케 하므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케 하시고자 하셨다고 생각합니다(참고: 신8: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광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삼하15:23).  그리하신 이유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빚어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사29:16, 30:14, 64:8; 행13:22; 롬9:21).  그 광야에서 다윗은 간절히 주님을 찾고 갈망했습니다.  시편 63편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물이 없어 메마르고 못 쓰게 된 이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유다 광야를 성소로 삼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2절).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가 주를 찬양하겠습니다”](3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5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출애굽기 3장 7-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잔인한 감독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내려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출하고 그 땅에서 이끌어내어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기름지고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신 것처럼 우리가 이 죄악된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는 사람이나 우리를 원통하게 만든 상대방의 손에서 우리는 반드시 건져주는 하나님이십니다(삼상 24:15).  다윗을 원통하게 만든 사울 왕의 손에서 다윗을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그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서도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한 일과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잠24:10,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42편 5, 11절과 43편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우리는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다윗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담대하게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은 그 저주 때문에 선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돌이켜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잠언 26장 2절을 보면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요 그 저주는 공의롭지 않은 저주(an unjust curse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미련한 사람의 공의롭지 않는 저주는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6:2).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참새가 “떠도는 것”은 ‘목적이 없기’(aimless)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적 없이 하늘에서 떠도는 참새는 어디에 착륙(landing)해야 할지 몰라 그냥 허공에서 맴돕니다.  바로 까닭 없는 저주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목적이 없다는 것은 저주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는 …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롭지 않은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골리앗이 블레셋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지만(삼상 17:43-44), 다윗은 도리어 승리했습니다(48-50절).

 

만일 미련한 자가 까닭 없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를 저주하고 핍박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7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한 일에 대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이유 없이 비난하는 교만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시편 기자는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묵상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까?  시편 119편 86, 161절 말씀입니다: “주의 계명은 모두 신뢰할 만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  권력 있는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주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의 계명을 신뢰하였고 또한 권력있는 자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누군가 우리를 까닭 없이 힘들게 하고, 까닭 없이 비난하고 심지어 이유 없이 우리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한대로 실제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6장 12절 문맥(5-13절)을 보면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는 도망가는 다윗을 계속 따라가면서 계속하여 그를 저주했습니다(5, 13절).  계속하여 저주하되 시므이는 다윗에게 “살인자여!  악한이여!  여기서 사라져라!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너에게 갚으셨다.  네가 사울의 왕위를 빼앗았으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것을 너의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너는 사람을 죽인 죄로 이제 벌을 받아 망하게 되었다!”라고 저주했습니다(7-8절,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다윗이 도망자라 할지라도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그리고 그 주위엔 적어도 600명이란 군인들이 있는데 어떻게 시므이가 계속해서 다윗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다윗 왕을 따르는 자들 중에 아비새가 다윗 왕께 “어째서 왕은 이 죽은 개 같은 녀석이 왕을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가 가서 당장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9절, 현대인의 성경) 바로 다윗 왕의 답변입니다: “이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저주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면 누가 그에게 네가 어째서 이렇게 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어라.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10-12절, 현대인의 성경).  아니, 어떻게 다윗 왕은 아비새로 하여금 시므이의 목을 단칼에 베도록 할 수도 있었으면서 계속해서 시므이로 하여금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도록 가만 놓아두었을까요?  좀 놀라운 장면은 시므이가 비탈길로 계속 따라오면서 여전히 다윗 왕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렸을 때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 말없이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왜 다윗 왕은 그리한 것일까요?  왜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계속 들으면서 아무 말없이 길을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혹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그 저주 때문에” 선으로 자기에게 갚아주시리라 기원하며 기대했기 때문입니다(12절).  다윗은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침묵하면서 시므이의 저주를 계속 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기원하며 기대했던 하나님은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23:5).  비록 시므이는 계속해서 다윗 왕을 저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변하여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은 실제로 시므이의 저주대로(삼하16:17) 그는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살인자였고(삼하11:17) 또한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일을 행한(27절) 악한 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므이의 저주를 이미 돌이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백한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12:13).  다시 말하면,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대로 “사람을 죽인 죄로 이제 벌을 받아 망하게 되”야할 사람이었지만(16:17, 현대인의 성경) 그의 죽을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12:13).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잠시 징계하여 압살롬에게 도망하여 광야로 몰아내셨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겸손케 하시사(참고:신8:2)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케 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간구케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사 다윗의 친구 후새(37절)의 계략을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게 들리게 하시사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이 후새의 계략을 택하여 시행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난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책략을 좌절시키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17:14,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사 그의 왕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18-19장).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므이의 저주를 변하여 다윗에게 복이되게 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통함을 감찰하시고 시므이의 저주 때문에 선으로 다윗에게 갚아 주신 것일까요? (16:12)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민22:12).  그는 어떠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언약의 말씀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삼하7장).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그 저주를 돌이켜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셨기에(삼하7:16) 시므이의 그 저주를 돌이켜 다윗에게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신21:23; 갈3:13).  우리는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영적인 복들을 이미 받았습니다(엡1: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33:29).

이렇게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우리의 삶 속에는 큰 위기가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위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큰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큰 고통을 아시고 우리가 당하는 큰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큰 위기로 인해서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대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영적 골든 타임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므로 영적 골든 타임이 진정 우리에게는 귀한 단련의 기회가 되어 우리가 정금과 같이 단련되어서 나오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길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는 줄 믿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4월 1일, 선하신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미련한 자들의 저주를 돌이켜 우리에게 축복이 되게 하실 줄 믿는 믿음으로 침묵 속에서 묵묵히 사명과 사역을 겸손히 감당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