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창세기 45장 4-8절 말씀 묵상]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원치않는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한 5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왜(Why?) 나의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에게 이러한 아픈 일을 일어나는 겁니까, 하나님?’,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저로 하여금 격게 하시는 것입니까?’ 등등.  우리는 마치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니, 하나님, 왜 우리를 이러한 물도 없고 먹고 싶은 고기도는 이러한 광야(사막)으로 인도하셨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궁핍하고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하나님 탓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지난 달(5월)에 저희 교회 영어사역 학생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때 저는 학생들에게 ‘만일 너희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처럼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면 너희는 어떻게 반응하겠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더니 한 대학생 형제가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께 화(mad)를 낼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형제에게 성경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도 하나님께 매우 성을 냈다 (욘4:1), 얼마나 요나가 하나님께 화가 났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절)라고 기도했을까요? 고 말해준 후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께 화를 낼 수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하도 대화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 형제는 하나님께 화는 나겠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그 형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을 구분한 것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났는지를 곰곰히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원치않은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접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화를 내다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원망과 분노를 멈출 수가 없기에) 좀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세 번째 반응대로 어떻게(How?) 이런 일들이 나에게 (한꺼번에) 일어났을까 곰곰히 생각하며 고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또한 하나님께 화를 내기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보아도 우리 명철(understanding)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될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왜 사랑하는 가족 식구에게 질병이 걸려고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가 됩니까?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부모님이신데 왜 암이 걸려고 고생을 하시는지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아무리 어떻게 이런 일이 내 가정에, 나의 삶에 일어났는지 수 없이 질문들 던져보아도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네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What?)일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결국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 믿음으로 원치않는 괴롭고 힘든 일들을 접할 때 마음 속으로라도 던지는 질문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질문을 수 없이 던지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많은 때에 우리가 그래도 믿음으로 처한 상황을 대처해 나가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을 때가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이걸꺼야’라는 식으로 생각은 할 때가 있지만 100%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거하는 피조물인 저와 여러분이 하늘에 계시는 조물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며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괴롭고 힘든 일을 격고 있을 때 ‘왜’(Why?) 이런 일이, ‘어떻게’(How?)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What?)라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Who?)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God’s doing)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하나님의 존재’(God’s being)에 초점을 맞추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아갈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풍년과 흉년,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등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연”이 있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27답).  그 말은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우연이 된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왜 이런 저런 일들을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시고자 우리의 삶 속에 섭리하십니다.  섭리하시되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십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5장 7).  그 이유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선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롬12:2).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 8장 28절을 좋아함: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제가 이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제가 보기엔 심지어 나쁜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당할 때에는 제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와중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로마서 8장 28절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그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며(히12:2) 또한 인내하며 견디게 하시므로 그 힘든 일들도 사용하시사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루시되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십니다(시34:8).

 

오늘 본문 창세기 45장 4-8절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저는 요셉의 삶을 한 3단계로 나눠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단계입니다.

           

요셉은 그의 나이 17살 때(창37:2)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한 가지는, 요셉은 형들보다 아버지 야곱에서 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창세기 37장 3-4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니 왜 아버지 야곱은 모든 자녀들을 다 똑같이 사랑하지 노년에 얻는 아들인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므로 그의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무엇인가 형들에게 미움받을 짓을 했나요?  아버지 야곱이 그를 특별히 더 사랑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닌가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요셉이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5절).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이나 꿈을 꾼 것 때문에 그는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았습니다(5, 9절).  아니 꿈 내용이 무엇이었길래 형들이 요셉을 더욱 미워한 것입니까?  첫 번째 꿈은 요셉과 형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단이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7절).  요셉은 그 꿈을 형들에게 말했을 때(5절) 그의 형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8절).  두 번째 꿈도 첫 번째 꿈과 비슷한 꿈이었음.  그 두 번째 꿈은 바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음(9절).  요셉은 이 두 번째 꿈도 형들에게 말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습니다(11절).  이렇게 두 개의 꿈을 꾼 요셉은 그 꿈들로 인하여 안그래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요셉이 형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야곱에게 다른 형들보다 더 사랑을 받는 것은 아버지 야곱이 잘못한 것이지 요셉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요셉이 꿈을 두 번이나 꾼 것도 자기가 꾸고 싶어선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 것이기에 저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을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형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움을 받으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향하신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요셉이 애굽 바로 왕의 신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종으로(39:17)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37:12-36).  저는 이 요셉의 미움의 단계를 생각할 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가족 식구들에게 미움을 받는가운데서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으십니까?  그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만일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롬12:2)을 믿으시겠습니까?

 

            두 번째 단계는, 요셉이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단계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지 않고 미디안 사람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린 요셉은(창37:28) 결국 또 다시 그 미디안 사람들이 요셉을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팝니다(36절).  결국 요셉은 사랑하는 식구들과 강제로 분리되어 외국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주위에 아무 식구들이 없이 외국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또한 요셉으로 하여금 형통케 하셨습니다(창39:1-2).  심지어 요셉의 주인인 불신자 보디발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과 또한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3절).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인 불신자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게 하시므로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5절).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를 버린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형통케 하십니다.  형통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게 하심을 보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불신자(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사 우리를 높이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불신자(들)의 집이나 회사에도 복을 내리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던 요셉에게 또 다신 큰 시련이 다가옵니다.  그 큰 시련이란 무엇입니까?  성경 창세기 39장 6절을 보면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함.  즉, 요셉은 유부녀에게 성적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때 요셉은 그녀의 청함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창39:6-8).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이 금한 것은 그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9절).  즉, 요셉은 자기의 주인인 보디발에게 충성했음.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더 큰 이유는 바로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10절).  그 때 요셉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1절).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요셉이 일하러 그의 주인 집에 갔었을 때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그 주인의 아내 밖에 없었습니다(11절).  어쩌면 그녀가 요셉과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요셉과 동침하기를 결심하고 그녀의 집 사람들을 다 집 밖으로 내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그녀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 요셉은 자기의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습니다(13절).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그녀를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의 유혹도 뿌리치고 도망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애굽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히게 됩니다(20절).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가만 보고만 계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게 갇히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멀리라하는 말씀(욥28:28)에 순종하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이전 보다 더 큰 유혹이 점점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성적 유혹에 시달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마음은 그 유혹으로부터 멀리도망가고 싶지만 연약한 우리의 육신은 그 유혹으로 자꾸만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인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게하셨는데(4절) 왜 하나님께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날마다 동침하자고 유혹하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까요(유혹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이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번 거짓 증거(14, 17-18절)로 말미암아 결국 요셉으로 하여금 옥게 갇히도록 가만히 보고만 계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 옥에서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 왕의 술 맡은 자를 만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40:1, 9-15절).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이 있는 왕궁에서 왕의 술 맡은 자를 만나게 하시지 왜 하필이면 옥에서 만나게 하셨는지 우리의 이성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꿈을 꾸어서 형들에게 더욱더 미움을 받은 요셉으로 하여금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케 하셨는지 참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왕의 술 맡은 자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결국에는 꿈을 꾼 애굽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41:9ff.).  근데 왜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과의 만남도 “만 이 년 후에”(1절) 그리하셨는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빨리 좀 만나게 해주셨으면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서 2년 동안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술 맡은 자처럼 애굽 왕 바로도 꿈을 꾸게 하시사(1절)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게 하시고(8절) 오직 요셉으로만 하여금 그 꿈을 해석케 하셨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이 낮고 낮은 땅에 거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사55:9).  인도의 확신 구절인 잠언 3장 5-6절 말씀이 생각: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롬12:2).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단계입니다.

         

언제가 저는 창세기를 읽다가 애굽 왕 바로가 요셉에게 한말 중 창세기 41장 40절 상반절과 43절 하반절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을 읽다가 이러한 생각들이 들었기 때문임: ‘애굽 왕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 집을 다스리라고 말하였는데(창41:40) 전에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을 다스리던 사람이 아니였던가?(39:1, 4-5)’, ‘그런데 이젠 요셉은 한 집을 다스리는게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한 나라(애굽)를 다스리게 되었다니,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생각들 속에서 저는 창세기에 나타난 요셉의 인생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특히 저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부터 애굽 왕 바로의 집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까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했었던 요셉(2절), 용모가 삐어나고 아름다웠으므로(6절)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7절).  그녀는 요셉에게 계속해서 눈짓하면서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7절).  그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음.  그리고 도망한 결과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17-20절).  그 옥에서 만 2년이 지난 후에(41:1) 요셉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16절) 애굽 왕 바로의 꿈들을 해석하므로(25-32절) 애굽의 총리가 되어 바로의 집인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40-43절).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시사 보디발의 집을 다스리던 요셉을 애굽 왕 바로의 집(나라)를 다스리는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요셉이 옥에 갇혀 있었을 때 애굽 왕에 범죄한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40:1)를 만나게 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그 이야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셉의 입장에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때에 자기가 갇혀있었던 옥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하여(1절) 같은 옥에 갇히게 된 것이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술 맡은 자의 꿈을 해석케 하시고(12-13절) 그 해석한 대로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전직을 회복하여(21절) 만 2년 후에(41:1)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1-7절) 요셉을 바로 왕에게 소개(9-13절)하게 될 줄 전혀 예상할 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옥에서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을 꿈을 해석케 하시고 그 해석되로 전직을 회복케 하시므로 결국에는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케 하시사 그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집안을 다스리던 요셉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높이 세우신 것임.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하심에 의하여 주관 되어집니다.  비록 그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하심이 그 때 그 순간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 모든 일들을 겪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감추인 계확하심이 조금씩 펼치사 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지난 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감추인 하나님의 계확하심을 어느 정도 충분히 깨닫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그리했습니다.  그는 나중의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4-5, 7-8).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죽습니다(50:26).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성가 중 “이 믿음 더욱 굳세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 가사 2절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 내가 있음을 믿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일들 우리의 이성으로는 왜 이런 저런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지 주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겠지만 우리 모두 주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보기엔 심지어 나쁜 일들 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루시되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맛보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시34:8).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큰 구원을 받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6월 22일, 주님이 뜻하신 일을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그 주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내가 있음을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