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역대하 20장 12절).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고전10:13) 실제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또는 큰 어려움)를 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그 큰 문제가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면 우리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큰 근심 가운데 거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큰 문제 앞에서 우리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좌절하며 또한 무능력한 우리 자신으로 인하여 낙망하기까지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 몰라 심지어 방황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역대하 20장 12절을 보면 큰 문제를 접한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이 나옵니다.  그들이 접한 큰 문제란 바로 “큰 무리”(2, 12절)인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것입니다(1절).  그 소식을 전하여 들은 유다 왕 여호사밧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 삶 속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호사밧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 역대하 20장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  유다 왕 여호사밧이 종교개혁을 일은 킨 후에[“그 후에”(1절)]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하였습니다(1절).  그 때 여호사밧은 그들이[“큰 무리가”(2절)]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자기를)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다(2절)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또한 놀랬습니다(3, 15, 17절).  그가 두려워하고 놀랬던 이유는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이(10절) 연합전선을 펴서 함께 유다를 치러왔는데 유다에서 멀지 않은 엔게디 [예루살렘으로부터 동남쪽으로 56 km 떨어져 있음(인터넷)]까지 이미 점령했기 때문입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여호사밧은 그 동맹군가 대적할 능력조차도 없었기에 두려워하며 또한 낙심했습니다(15, 17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우리 능력 밖에 큰 문제를 접하게 되면 충분히 두려워하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우리 힘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를게 만들 정도인 그 큰 문제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며 걱정하며 충분히 낙망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호사밧은 “오직 주만 바라보”았습니다 (12절).  우리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큰 문제를 바라보기보다 그 큰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크신 주님 만에 그 큰 문제조차도 주권 속에서 다스리시고 사용하시사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둘째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성경 역대하 20장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왕 여호사밧은 두려움 가운데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12절)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3절).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온 유다 백성들에게도 금식하라고 공포하였습니다(3절).  그러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전국 각처에서 예루살렘을 모여 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4절).  그 간구 내용이 역대하 20장 6-12절에 나와있습니다.  그 간구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였습니다(6절).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신 “이 땅”에 살면서 건축한 성전 앞에 주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임을 믿는다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7-9절).   그리고 그는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셔서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의 땅을 돌아가면서도 그들을 치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이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왔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10-11절).  그리고 나서 여호사밧은 오늘 본문 12절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 후렴 가사가 생각납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큰 문제로 인하여 우리가 어두운 고통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조차도 못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마음으로 신음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에게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큰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그 큰 문제도 주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고(비록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모른다 할찌라도) 주님께서 그 큰 문제조차도 충분히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주님께서 그 큰 문제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단련시키신 후에) 건져주실 줄 믿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와 소망를 가지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간구하십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116:1).

 

            마지막 셋째로,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성경 역대하 20장 21절을 보십시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유다 왕 여호사밧과 온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한 후(3-4절)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서 있을 때(13절)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였습니다(14절).  그 때 야하시엘은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15-17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말씀입니까.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은  …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여호사밧 왕과 온 유다 백성들은 그저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호사밧 왕이 “몸을 굽혀 얼굴에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18절).  “그 때 고핫 자손과 고라 자손의 레위 사람들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19절).  놀랍지 않습니까?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호사밧 왕과 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큰 무리”인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과 전쟁을 해서 싸워 승리해서 하나님께 경배를 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인가요?  아니잖습니까.  아직도 그 큰 무리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엔디게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여호사밧 왕과 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가 있었을까요?(21절)  그들이 그리 할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사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 그의 종 야하시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20절).  신뢰하였기에 그들은 승리의 확신[“그러면 여러분이 승리할 것입니다”(20절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린 것입니다(21절).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성경 역대하 20장 22-24절을 보십시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1절)라고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22절) 하나님께서 그 “큰 무리”인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는데 유다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그 무리”들이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힘과 능력”입니까(6절, 현대인의 성경).  누가 능히 주님과 맞설 수 있습니까(6절).  하나님은 여호사밧 왕와 온 유다 백성들의 간구대로 “그들을 징벌”한 것입니다(12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믿음으로[20절, “신뢰하라”(2번)] 간구하고 믿음으로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결과입니다.  그 “큰 무리”가 아직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 응답의 말씀을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받은 여호사밧와 유다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하였던 그 “큰 무리”에 침략적인 상황을 변화시켜주시되 아예 그들을 없애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큰 문제를 접했을 때 그 큰 문제란 상황에 초점을 맞춰서 하나님께 간구하는데서만 끝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과 낙심 속에서 하나님께 그 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하는데서만 그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 보다 우리는 여호사밧와 온 유다 백성들처럼 그 큰 문제란 상황에 초첨을 맞추지 말고 그 상황조차도 주권적인 뜻 안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눅18:1).  그리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되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십니다.  믿음과 확신을 주시되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하시사 하나님의 뜻(롬8:27)을 깨닫게 하시므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진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 근거를 두게하십니다.  그럴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큰 문제란 (또는 크게 힘든) 상황에서도 더 크신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다윗이 밧세바와의 낳은 첫 아이의 죽음 후 경배(삼하12:20)와 욥이 자녀 10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하나님께 예배(욥1:20)]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감사하므로 찬송케 하십니다(대하20:21, 시63: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시작케 하실 때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 응답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의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1.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1.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 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 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1.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할까”

 

                                                             [새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인생의 큰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구원의 능력과 영원한 사랑을 경험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5월 22일, 수 많은 때에 내 능력 밖에 일을 접하여 어쩌힐 바를 보를 때에도 나로 하여금 나의 무능력함을 인정케 하시므로 전능하신 주님 만을 바라보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잡고 간구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