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팔은 아합

 

“더 아름다운 포도원”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그리도 원했는지(왕상 21:1-2), 그는 돈으로 값을 내서 다른 포도원을 살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나봇의 포도원을 그리도 원했는지(2절),

그 이유가 다만 나봇의 포도원이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기 때문이라니(1-2절)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분명히 나봇은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시기에(3절)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4절, 참고: 6절)

이스라엘 아합 왕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였습니다(4절).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5절)라고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물었을 때 아합 왕은 그녀에게 다 보고(?) 합니다(6절).

그 때 오죽 했으면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겠습니까: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7절)

[(현대인의 성경) “이래서야 어떻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마치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이끌기 보다 그녀에게 이끌려서 선악과을 같이 먹은 것처럼(창3:6),

또한 마치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그녀의 여종인 하갈에게 들어간 것처럼(16:1-2),

아합은 자기 아내 이세벨을 이끌기보다 그녀에게 끌려 다니면서

결국에는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욕심인 나봇의 포도원을 얻게 됩니다(왕상21:15).

 

아내 이세벨을 통하여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15절)라는 말을 듣고(16절)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간 아합(16절),

참으로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 아합은

자기 자신을 팔아(20, 25절)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20절).

그와 같이 그 자신을 팔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었습니다(25절).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습니다(26절).

 

그런데 이러한 자도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그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내리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29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