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마음에 응어리를 주는 아버지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사무엘하 14장 33절).

 

 

            아버지는 나에게서 멀리 계십니다.  한 지붕 아래 거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가 멀리계신 것만 같습니다.  나는 자라나면서 아버지를 뵌적도 별로 없습니다.  같이 여행 갔다온 기억은 둘째치고 나는 너무 바쁘셔서 집에 항상 늦게 들어오신 아버지를 뵌 기억도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도 따듯한 말을 해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나에게 가끔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시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을 평생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나를 사랑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십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는 응어리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 못한 나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만 생각하면 마음의 응어리로 인하여 마음이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나 또한 내 자녀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내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마 내 자녀는 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봅니다.  내 마음대로 사랑 표현이 안되네요.  혹시 나처럼 내 자녀의 마음에도 나로 인하여 응어러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4장 33절을 보면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과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녁 때에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목욕하는 밧세바(삼하11:2)가 우리아의 아내인 것을 다 알아보고도(3절) 자기에게 데리고 와서 동침하여 그녀로 하여금 임신케 한 다윗(4-5절), 그것을 덮으려고 요압 장군으로 하여금 우리아를 자기에게 오게 만들어서(6절) 두 번이나 집으로 내려가게 하여(8-13절) 자기 아내와 자게 만드려고 했지만(11절) 충성된 군인인 우리아가 그리하지 않으닌까 결국 그를 살인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으로 옮겨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17절).  그런 후에도 다윗은 유부녀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을 때까지(약 10개원?)(27절)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어(12:1) 그가 마땅히 죽을 자(5절)임을 지적하였을 때(7절) 그 때서야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므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가 죽었습니다(14-19절).  그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인 암논이 “아름다운 누이” 다말(13:1)을 억지로 동침합니다(14절).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오리버니인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여(22절) 2년 동안(23절) 기다렸다가(계획했다가?) 결국에는 암논을 죽입니다(28-29절).  그리고 그는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서 3년을 지냅니다(38절).  그 때에 요압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한 것(39절)을 알고(14:1) 지혜로운 여인을 통하여(2절) 결국 압살롬을 그술에서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게 합니다(21, 23절).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으로 하여금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24절).  3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압살롬을 자기 왕궁으로 데리고 왔으면서도 다윗은 2년 동안 자기 아들 압살롬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28절).  도합 5년입니다.  그술에서의 3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2년, 도합 5년 동안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은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아버지), 못했습니다(아들).  좀 이해가 안됩니다.  아들 압살롬이 그술에 있엇을 때에는 그를 그리도 간절하게 사모하던 아버지 다윗이 왜 압살롬을 자기 왕궁으로 데리고 왔는데도 그로하여금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하였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요압도 좀 이해가 안됩니다.  자기 주인인 다윗 왕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한 것을 알았을 때(13:33, 14:1)에는 지혜로운 여인을 통하여 압살롬을 예루살렘 왕국으로 데리고 왔으면서 왜 왕궁에 데리고 온 후에는 2년 동안이나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 왕의 얼굴을 보도록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좀 의문이 듭니다.  어쩌면 다윗 왕이 압살롬이 그술에 있었을 때에는 그를 간절히 사모하다가 자기 왕궁으로 데리고 오고 난 후에는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일 다윗이 왕국에서도 압살롬을 간절히 사모했다면 왜 요압이 나서서 다윗과 압살롬으로 하여금 서로 얼굴을 보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다윗은 자기가 간절히 사모했던 아들 압살롬이 이젠 에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왔으닌까 사모하는 마음은 식어지고 암논을 죽인 것을 생각하고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압살론은 요압을 자기 아버지 다윗 왕에게 보내려고 요압을 만나려고 두 번 시도하였습니다(14:29).  그러나 요압이 자기에게 오지 않자 압살롬은 자기의 종들을 지켜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기까지 합니다(30절).  그 때서야 요압이 압살롬에게 오고 압살롬은 요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은 당신을 왕에게 보내 왕이 나를 볼 생각이 없었다면 무엇때문에 나를 그술에서 데려왔는지 한번 물어 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내가 차라리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좋을 뻔하였소.  이제 나를 왕과 좀 만나게 해 주시오.  만일 나에게 죄가 있다면 왕이 나를 죽여도 좋소”(32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압살롬이 요압에게 저렇게 말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도 2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압살롬, 아버지 다윗 왕이 자기를 볼 생각이 없었다면 무엇때문에 자기를 그술에서 데려왔는지를 알고 싶어했던 압살롬, 차라리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술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더 좋게 여긴 압살롬, “이제 나를 왕과 좀 만나게 해 주시오”라고 요압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압살롬, “만일 나에게 죄가 있다면 왕이 나를 죽여도 좋소”라고까지 말하는 압살롬, 이 압살롬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게 자식에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왜 아버지는 자식으로 하여금 자기의 얼굴을 못보게 하는 것인가요.  그리도 용서가 안되는 건가요.  그렇게 한 지붕 아래서 2년 동안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안그래도 압살롬은 그술에서 3년, 예루살렘 왕국에서 2년, 도합 5년 동안이나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자식의 마음을 어떻게 아버지가 그리도 몰라줬던 것일까요.  이유가 어떠하든 자기 아들의 얼굴을 집(예루살렘 왕궁)에 데려다 놓고도 2년이나 보지 않은 것은 아버지 다윗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는 압살롬의 마음에 상처를 줬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결과로 압살롬은 4년(15:7) 동안 준비해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릅니다(15장).  물론 오늘 본문 사무엘하 14장 33절을 보면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화해하여 그와 입을 맞추었지만 제 생각엔 화해할 기되 혹은 타이밍을 놓치고(2년 동안 자기 왕궁에 있었을 때 기회가 많았을텐데) 너무 늦게 화해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해하는 시간이 느져지면 느져질 수록 자식의 마음은 상처와 눈물과 응어리로 더욱더 쌓이게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안좋은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들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응어리로 인하여 평생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보다 더 많은 안즣운 추억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자기 자녀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늦게나마 나는 내 아버지처럼 하지 말아야하지 결심하고 자녀를 사랑해 보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이미 자녀의 마음은 굳어져서 내 사랑을 거부하는 자녀의 모습도 보고 있는 부모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이라도 자녀와 화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자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이라도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해야 하지 않나요?  너무나 늦은 것일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가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4월 10일, 양가 부모님과 세 자녀들과 가정의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지체들을 기억하며 아빠 아버지께 기도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