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너무 밝히는 목사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민수기 22장 18-19절).

 

 

            ‘왜 우리 목사님은 자꾸만 강단에서 돈 애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좀 돈 얘기를 그만하셨으면 좋겠는데 ….’  요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님들은 더 이상 참다 못하여 아예 다른 교회로 옮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성도님들은 목사님에게 시험이 들어서 아예 교회를 떠나는 분들까지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지금 교회 주일 예배 강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기보다 돈이 선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지경까지 교회가 왔을까요?  그 원인은 돈을 사랑하는 우리 목사들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돈을 사랑하는 우리 목사들은 두 주인인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돈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마6:24).  지금 우리 돈을 사랑하는 목사들은 강단에서 입술로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힘차게 설교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돈은 나의 힘이다’ 라고 믿고 돈을 축적하기에 바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매우 좋아보이는데 속으로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금 우리 목사들은 매우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돈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금 우리 목사들은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 목사들은 겉으로는 금식도 하고(마9:14), 안식일인 주일도 철저하게 거룩하게 지키고(마12:2, 막2:24), 십일조도 철저히 드리며(마23;23),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막2:16).  진짜 겉으로는 아무 부정도 없어보이고(막7:5) 깨끗하게 보입니다(마23:25).  그런데 우리 목사들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눅11:39).  지금 우리는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사56:11).  지금 우리는 우리 이익만을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사들이 되었습니다(사56:11).  작은 교회 목사부터 큰 교회 목사들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다 거짓을 행하고 있습니다(렘6:13).  그 탐욕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 목사들은 다 미련하게 되었습니다(전7:7).  지금 돈이 우리의 명철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전7:7).  그 탐욕으로 인하여 우리는 방탕의 생활도 가족 식구 및 교회 식구들 몰래 하고 있습니다(마23:25).  지금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까지 하고 있습니다(고전5:11, 엡5:3).  이렇게 우리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벧후2:14).  우리는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벧후2:14).  그러기에 지금 우리 탐욕에 이끌림을 받는 목사들은 교회 강단에 서서 돈을 너무 지나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에는 탐욕이 가득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단에 서서 돈을 밝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거짓된 마음과 입술로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님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삯군 목사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어쩌면 사모님들은 적어도 짐작을 할 수 있을지도?  왠지 사모님들 조차도 모를 듯).  그러니 이젠 성도님들만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든 시대일 뿐만 아니라 누가 참 목사이고 거짓 목사인지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든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이 사람이 진짜 참 선지자 인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인가?’라는 질문까지 던지면서 저를 혼동되게 만든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18-19절 문맥에 나오는 “발람”이란 사람입니다. 

 

처음에 발람 이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는 발람이 한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이 참 선지지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민22:8),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겟노라”(18절),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34절),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38절),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23: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26절), “가령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24:13).  이 말씀들만 읽다보면 이 발람이란 사람은 참 선지자인가 보다 라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처음에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그렇게 착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발람에 대한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어, 이 사람은 참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the fee for divination – 점볼 때 내야 할 수수료?)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22:7), “그(발람)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22절), “… 보라 내(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발람의)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32절), “야곱을 해할 점술(sorcery)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divination)이 없도다 …”(23:23),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sorcery)을 쓰지 아니하고 …”(24:1).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저는 발람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이기 보다 점술을 보는 술사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술사가 모압 왕 발락의 집에 가득한 은금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꼭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는 사람처럼 말하는지 좀 알송달송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발람에 대해서 좀 더 묵상하다가 성경 민수기 22-24장 외에 다른 곳에 적혀 있는 발람에 대한 말씀들을 보면서 ‘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참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6),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신23:4),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who practiced divination)도 칼날로 죽였더라”(수13:2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느13:2),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who loved the wages of wickedness)”(벧후2:15),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they have rushed for profit into Balaam’s error)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1),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to entice the Israelites to sin) 우상(idols)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sexual immorality)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이 말씀들을 보면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18-19절에 나오는 발람이란 사람은 분명히 거짓 선지자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점술가였습니다(수13;22).  그는 모압 왕 발락의 뇌물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입니다(신23:4, 느13:2).  그가 뇌물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그는 불의 삯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벧후2:15).  그 결과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가 놓은 걸림돌에 넘어져서 브올(Peor)에서 모압 여인들과 행음하고 그녀들이 섬기던 바알브올(브올에서 섬긴 바알)에게 절하며 우상의 재물을 먹는 죄를 범하였습니다(민25: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였”습니다(호9:10).  그 결과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진중에 염병이 돌므로[“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시106:29)] 죽은 자가 2만 4천명이나 되었습니다(민25:1-8). 

 

            이렇게 저는 성경 말씀을 읽고 살피며 묵상하는 과정 속에서 발람이란 인물인 하나님의 참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저는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18-19절을 읽고 묵상하다가 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이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의문은, 모압 왕 발락이 자기 신하들인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7절)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15절) 발람에게 보내어 “아무것도 꺼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이스라엘)을 저주하라”(16-17절)고 말을 전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발람은 이렇게 답변을 했다는 것입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분명히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발람은 “은금”을 말하면서 발락의 집에 가득한 은금을 자기에게 준다 할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든 의문은 ‘아니 발락은 발람에게 은금 얘기를 한 것 같지 않고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왜 발람은 “은금” 얘기를 하는 것인지 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민수기 24장 11절과 13절을 보면 분명히 발락 왕은 발람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면 그를 “존귀”하게 하려고 한 것 같은데(11절) 발람은 발락 “집에 가득한 은금”을 말하고 있습니다(13절).  그러면서 발람은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13절) 왠지 저는 이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발람은 발락에게 높임을 받고 크게 존귀하게 되는 것보다 은금을 더 원했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의 생각을 확인에 준 성경 구절은 바로 신약성경 베드로후서 2장 15절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참고: 유1:1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발람은 “불의의” 은금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발람은 돈을 사랑하며 돈을 밝히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둘째 의문은 바로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19절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저는 이 발람의 말을 읽고 묵상하다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이미 발락 왕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을 발람에게 보냈을 때(7절) 발람은 그들에게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8절)고 말한 후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로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절)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는데  발람은 또 다시 19절에 와서 발락 왕이 두 번째로 보낸 신하들에게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고 말한 후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말한 것인지 좀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라(12절)에 이미 명하셨는데  발람은 하나님께 또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미 하신 말씀(12절)외에 “더 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발람은 18절 하반절에서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고 말해놓고 왜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12절에서 하신 말씀에서 “더 하실는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은금을 탐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충분히 발락의 은금을 탐나서 한번 더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 외에 혹시나 추가로 ‘그들과 함께 가라’(민22:20, 35)는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분명히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라(12절)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 와서는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더든 일어나 함께 가라”(20절)고 말씀하셨을까 입니다[나중에는 “여호와의 사자”(22절)도 발람에게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35절)고 명하심].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닌까(21절) 진노하셨습니다(22절).  잘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있었던 저에게 13절 하반절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발람의 말중에 특히 제 눈에 뛴 것은 바로 “허락”이란 단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두 가지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directive will)과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permissive will)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뜻입니다.  예를 들어 삼손은 하나님께 받쳐진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삼손을 향하신 하나님이 직접적인 뜻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어기고 삼손이 구별되지 않는 그 블레셋 여인하고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말은 삼손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어기고 자기의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블레셋 여인하고 결혼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가 믿는 자와 결혼해서 거룩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믿지 않는자와 결혼하려고 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결혼을 허락하실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믿지 않는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사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에 불순종하는 선택을 할찌라도 그것을 허락하시사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참고: 롬8:28).   이 하나님의 두 가지 뜻을 민수기 22장 말씀에 적용해보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은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 하지도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조 말라는 것이였습니다(민2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어기고 불의의 삯인 발락 왕의 은금을 탐하여 그 신하들과 함께 가길 원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본(19절) 발람에 원하는 것을 “허락”하시사 그로 하여금 발락 왕의 신하들과 함께 가는 것(20, 35절)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참고: 롬1:24, 28 - “내버려 두사”, 26절 – “내버려 두셨으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여호와의 사자”가 “을 빼어 손에 들고” “좁은 길”에 서서 발람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22-24절).  흥미로운 점은 칼을 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본 “나귀”는 자기 주인인 발람을 살려보려고 가던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므로(23절) 발람에게 두 번이나 “채찍질”을 당하고(23, 25절) 한번 “지팡이”로 맞았는데(27절) 칼을 손에 들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했던 발람은 오히려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28절) 자기에게 충실했던(30절) 자기 나귀에게 자기를 “거역”했기 때문에 만일 자시 손에 “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9절)고 말한 것입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아니 “거역”은 자기가 하고 있었으면서 나귀에게 거역한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모습도 보지 못하면서 그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는 자가 나귀에게 노하여 지팡이로 때리고 심지어 자기 손에 칼이 있으면 “곧 너(나귀)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장면입니까.  이러한 웃지 못할 우스운 장면이 지금 교회 안에서도 보이지 않습니까. 

 

고 옥한음 목사님은 곤충의 숫컷과 암컷을 구분하기가 무척 힘들듯이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고 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지금 이 시대에는 진짜 그리스도인처럼 너무나 흡사한 모조품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게 진짜 명품인지, 어느게 가짜 명품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 세상, 그 만큼 모조품이 진짜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참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사실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목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즉, 누가 참 목사고 누가 거짓 목사인지 구별하기가 너무나 힘든 시대입니다.  너무나 진짜 목사 같이 보이는데,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 같고 영혼도 사랑하시는 것 같은데, 너무나 설교도 좋고 심지어 강당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진짜 복음적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 목사가 거짓 목사일 수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관하여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무엇이든지 저희 말하는 바”는 행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였지만(3절) 그들이 하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맞는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 모세의 율법에 첨부한 유전(장로들의 전통)까지 듣고 행하라 고 모인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던 모세의 율법을 행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행하되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본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교회 안에서도 성도님들은 본 받지 말아야 할 목사들이 있습니다.  바로 외식하는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외식하는 우리 목사들은 주중에 가정에서 올바른 삶은 살지 못한다 할찌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때 강단에서 올바른 성경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라(빌1:27)는 말씀을 어기면서까지도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물론 지금은 강단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지 않은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이지만).  심지어 우리 목사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마음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있으면서도(눅6:14)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돈을 밝히지도 않은 척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줄을 알고 돈을 탐내면서도(딤전 6:10) 주일 예배 때 강단에서 성도님들 앞에서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고 또한 성도님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까지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러한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불의의 삯을 사랑했던 거짓 선지자였던 발람과 같은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골3:5).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돈을 사랑하므로 우상숭배하는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러는 세대 가운데서”(빌2:15) 어그러진 길을 멈추치 않고(렘14:10) 걸어가는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마6:24)는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돈을 너무 밝히는 우리 목사들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돈을 사랑하며 돈을 너무 밝히는 우리 목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을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던 거짓 선지자 발람을 통하여서도 세 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신 것(민24:10)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으로 하여금 모압 왕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하는 것’은 허락하셨지만(22:12-13, 20, 35)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2절).  하나님께서는 은금을 사랑하였던 거짓 선지자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것을 강권적으로 막으셨습니다(24:11).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였기 때문입니다(22:12).  바로 여러분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이십니다.  진찌 여러분 성도님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십니다(신33:29).  그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너(여러분) 같이 얻는 백성(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신33:29).  여러분이 “아직 죄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여러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여러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며 돈을 너무 밝히는 우리 목사들을 통해서도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사 복을 받은 자들인 여러분 성도님들을 오늘도 축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http://youtu.be/XDvqx5af_lk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복 받은 성도님들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감격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2월 17일, 마음의 탐욕의 죄를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자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