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Guilty Conscience)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장 12, 32절).

 

 

            만일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 있다면, 즉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삼상24:5, 삼하24:10, 요8:9) 그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도 그것은 아직은 양심이 버리지 았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를 죄를 범했을 때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할 것입니다(요일3:21).  그리고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고전14:24).  그러나 만일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었다면(딤전4:2) 또는 우리가 양심을 저버렸다면(딤전1:19)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에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뿐아니라 느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딛1:15). 

 

            오늘 본문 출애굽기 32장 12, 32절 배경에 나오는 출애굽 당시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의 편에 있었던 레위 자손들(26절) 외에는 모두 다 양심이 더러워져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부어 만들어(8절) “여호와의 절일”(5절)에 그 금송아지를 “예배하며 그것에게 재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신이라”고 외치면서(8절) 하나님께 “큰 죄”(21절)를 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편에 있었던 레위 자손들은(26절)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 사건에 참가하지 않았던지 그 사건을 원통히 회개하였지만(박윤선) 그 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 우상 사건에 참가하여 그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며(6절) 춤추며(19절) 노래하면서(18절)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1절)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모세의 형인 아론조차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모세가 아론에게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21절)라고 물었을 때 아론의 답변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22-24절).  이 답변을 보면 우리는 아론은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다(21절)는 사실을 인정하기 보다 자기의 죄책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엿 볼수가 있습니다(박윤선).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22절)로 말한 것을 보면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 지우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박윤선).  또한 그는 모세에게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24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론은 자기는 최책을 전연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박윤선).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자한 것(the people were out of control)은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한 것이다(Aaron had let them get out of control) 라고 말한 것입니다(25절).  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방자하여 하나님게서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은 부패한 백성이요(7절) 또한 목이 뻣뻣한 백성이였기 때문입니다(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이제 네가 나를 말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내가 분노하여 그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대신 너를 통해 큰 나라를 세우겠다”](10절).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패하고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의 기도가 두 개 기록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11-13절에 기록되 있으면 두 번째 기도는 31-32절에 기록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뜻을 돌이켜 주세요’(12절)란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10절).  즉,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disaster)를 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12, 14절).  모세는 이 뜻을 돌이켜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간구하되 모세는 언약의 하나님께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13절)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구하였습니다.  또한 모세는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11절)하사 그들을 진멸하신다면(10절)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조롱할 것이기에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12절)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14절).  모세의 두 번째 기도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32절)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가서 간청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31절, 현대인의 성경).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것이 큰 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 큰 죄를 자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후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32절).  어느 정도로 간절히 간구하였는가 하면 모세는 자기의 이름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 버려주실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32절).  이 말은 모세는 자기 자신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이 지워진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사함을 그리도 간절히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간절함을 사도 바울에게도 봅니다. 바울에게는 “큰 슬픔과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롬9:2).  그래서 그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현대인의 성경) “만일 내 동족이 구원만 얻는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3절). 

 

저는 모세의 이 간절한 기도를 묵상할 때 대제사장이 되시며(히7:24, 26)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분이신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님(딤전2:5)의 중보기도가 생각났습니다(히7:25).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9:28) “죄를 없이 사히려고”(26절) “단번에 자기를” 십자가에 “드려”(7:27)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9:28)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9:12).  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사(10:12)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34). 과연 대제사장이 되시며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간구하고 계실까요?  마치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처럼 진정한 모세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주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시지 않으실까요?  물론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죄인된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사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사 우리를 진멸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사 우리의 원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하여주셨기에 중보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약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1:9)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되시는[“변호해 주시는”(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2:1)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해 주시므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9, 현대인의 성경).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롬14:22, 현대인의 성경).  몰론 죄책감이 없다고 하여 우리가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고전4:4).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옳치 않는 일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결코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이 없는 사람의 양심은 마비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벧전3:16).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일에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히13:18).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히9:14).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죄책감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1월 27일, 평생 죄를 지으면서 죄책감 속에서 허덕일 수 밖에 없는 죄인이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바다 바라봅니다”(새찬송가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절)를 찬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