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1장 16절).

 

 

            어제 새벽기도회 후에 저는 저희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을 뵈러 그 분들이 계신 세 군데 양로원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분들을 방문하면서 배운 점은 세 분 모두 다 감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연세도 많으시고, 질병도 있으시고, 넘어지셔서 다치시고, 힘드시고, 어려우시고, 외로우실 텐데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왜 그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실까요?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케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에베소서 1장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멈추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주 예수님 안에서 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15절).  다시 말하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주 예수님을 잘 믿고 모든 성도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할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계속해서 간구하였습니다.  저는 그 간구한 내용은 한 세가지 요약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욱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지혜와 계시의 영”(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을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과연 바울은 기도하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실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1:3).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4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5절),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의 영광을) 거저 주”신 하나님(6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속량 곧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7절),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하나님(8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하나님(9절),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 곧 너희(우리)의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쳐주신(13절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 하나님을 더욱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호6:4).  새찬송가 560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게 원하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빌3: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알게 하여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들의 “마음의 눈”(the eyes of your heart)을 밝혀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길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사 그들에게 주신 소망을 알게 하여 주시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지만(2:12)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4)고 말한 것입니다.  그 “한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그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1:12, 참고: 6, 14절).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게 되는 것입니다(3:21).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은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가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움 받는 것입니다(5:27).  바울은 이 소망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기에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롬8:24).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딛1:2).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3:7). 그러므로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롬 8:24) “하늘에 쌓아둔 소망”(골1:5)을 가지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롬12: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1:3)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알게 하여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하나님)의 힘의 위력”(his incomparably great power), 즉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크신 능력(19절)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게 한 능력입니다(20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길 원했습니다(6:10).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3:1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롬5:5).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롬8:11).  동일하신 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의 즉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11절).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질 때 성령님은 우리를 순식간데 홀연히 다 변화시키실 것입니다(고전15:51).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52절).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빌3:21).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하나님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기에(고전8:3)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임봉희 집사님과 유정숙 권사님과 김동윤 집사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12월 12일, 나의 소망, 나의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더욱더 자라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