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1절,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데 그것도 무척 사랑하는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여러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계속해서 그 사람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1장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인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고전15:3-4)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고후11:4)를 용납해서는 아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사도가 전파하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너무나 잘 용납하였습니다(4절).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잘 용납하고 있”었습니다(19절).  심지어 그들은 “누가 너희(그들)을 종으로 삼거나 잡아 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빰을 칠지라도 너희가(그들은) 용납하”였습니다(20절).  그런 그들에게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5절) 사도 바울은 “너희를(그들을) 높이려고 나(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그들)에게 전”하였고(7절) 또한 그들을 섬겼습니다(8절).  과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9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길 원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매우 조심했습니다(9절).  그래서 그는 몇번이고 비슷한 말을 반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다른 교회에 비해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지 않은 기것이 잘못이라면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12:13, 현대인의 성경), “나는 이제 세 번째 여러분에게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4절, 현대인의 성경), “어쨌든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운 일이 없어도 간교하게 속임수로 여러분을 착취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것만 그들 중에는 바울이 자기들을 착취했다고 간교하게 속임수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도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거만 바울은 오해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무척이나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그 자식이 어미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는커녕 오해를 하고 있다면 그 어미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미로서 자식을 사랑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짐이 안되려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며 섬겼는데 그 자식이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나에게 짐이 됩니다’라고 만일 말한다면 그 어머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도 여러분은 계속해서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에게 짐이 안되고자 힘쓰지 않겠습니까?  그게 어머니의 사랑아닌가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 이해를 받지 못하고 오해를 받을지언정 우리는 계속해서 신실하게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될 수있는 데로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또한 짐을 될 수 있는데로 지우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내어 주어야 합니다(15절).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 외에도 날마다 여러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내 마음은 무거웠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사도 바울은 날마다 마음 속에 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28절, 개혁개정).  그는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는 누가 약해지면 자기도 약해졌고 누가 실족하면 자기도 애타했습니다(29절)[“누가 죄를 지으면 내 마음도 아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3절).  그리고 그는 고린도 교회에 갈 때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서로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생길까” 염려했습니다(12:20, 현대인의 성경).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당파 싸움과 헌담과 교만과 소란”이 있을까봐 염려했습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갈 때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더러움과 음란과 방탕을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내가 그들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염려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11:28).

 

            여러분은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염려해 보신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노심초사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사랑하는 내 자식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건강은 괜찮은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나, 혹시나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적싸움에 잘 승리해야 할텐데, 등등 어머니는 노심초사 이러한 염려와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몹시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우는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식과의 기대가 서로 어긋날 때에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두려워할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이 슬프고 두렵고 아프며 또한 무거울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도 베드로의 말이 생각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는 이 예수님의 초청에 겸손히 믿음으로 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야 합니다.  가서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덕을 세우기 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덕을 세우기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방언을 말하는 자”와 “예언하는 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므로(4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5절)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8:1),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10:2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해야 합니다(롬15:2)라고 말하였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겐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살전5:11).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엡4:29).  그만큼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면서 이렇게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19절에 와서는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인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행한 “이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고 모욕을 당하고 가난하며 핍박과 괴로움받는 것을 기뻐하”였고(10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참고 놀라운 일과 여러 가지 기억을 행한 것”(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과 “부담을 주지 않은 이것”(13절, 현대인의 성경),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내 몸까지도 기꺼이 바”칠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15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이 모든 일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1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19절).  그 이유는 바울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착취하지 않았고(16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들의 이득을 취한 것이 없었것만(18절) 고린도 교회 성도들중 바울이 “간교하게 속임수로 여러분(자신들)을 착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덕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덕을 세우고자 했었지만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오해를 받았던 사도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었을까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우리는 그들의 덕을 세우도록 힘써야 하나요?  그들의 덕을 세우고자 우리도 바울처럼 “약해지고 모역을 당하고 가난하며 핍박과 괴로움”을 받아야 하나요?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불공평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13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그들에게 오해를 받으며 불공평하게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그들의 덕을 세워야 하나요?  사도 바울처럼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도 기꺼이 바칠정도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들의 덕을 세우고자 헌신하며 희생해야 하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우리 같이 하나님의 원수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우리의 덕을 세우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헌신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의 덕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은사를 주셨는데(고전14:3, 4, 5, 12, 26) 왜 우리는 "자기의 덕"(4절)을 세우려고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자기의 덕과 자기의 영광을 세우려고 주님의 교회를 봉사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고 어리석게 구는 것입니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우리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사람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섬기되 우리는 될 수 있는데로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우리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를 세우고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를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어도 하나님께 이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12월 10일, 자기의 덕이 아닌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헌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