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셨나요?”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에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 1장 9-12절).

 

            “하나님은 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셨나요?”  어느 형제가 저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이렇게 간략하게 그 형제에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마음.”  그랬더니 그 형제가 저에게 이렇게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 하나님 마음을 짐작해보시면 안될까요?”.  그 때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안될 것까지야 없을 수 있겠으나 짐작하기를 거부(거절)함.”  제가 이렇게 그 형제에게 답변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셨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는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을 때에는(욥1:11)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고 그 주권적인 뜻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을 믿기 때문입니다(롬12:2).  비록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정확히 그리고 충분히 알 수도 없겠지만) 욥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 있음을 믿기에 저는 왜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케 하셨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물론 욥이 당하고 있었던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치게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유를 욥기 1장 8절과 2장 3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2:3).  즉,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이 세상에 없음을 사탄에게 자랑(?)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탄이 욥을 쳤어도 욥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습니다(3절).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임이 입증되었습니다 (1:8; 2:3).  그리고 사탄의 말이 거짓말임이 입증되었습니다(1:9-11, 2:5).  사탄의 거짓말은 주님께서 욥과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시고 또한 욥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을 땅에 넘치게 하셨기 때문에(1:10)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8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면 욥이 틀림없이 주님을 향하여 욕한다는 말이 바로 사탄의 거짓말이었습니다(11절).  또한 사탄의 거짓말은 욥의 뼈와 살을 치시면 욥이 틀림없이 주님을 향하여 욕한다는 말이었습니다(2:5).  그 사단의 거짓말에 욥의 아내는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남편인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룻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절).  사탄의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여 욕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욥의 아내는 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욥의 아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욥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와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10절).  그리고 욥은 이 모든 일에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10절).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1:22).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20-21절). 

 

            저는 그 형제가 왜 저에게 “하나님은 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셨나요?”라고 질문을 던졌는지 충분히 이해는 못하지만 그렇게 질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질문을 충분히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가 예기치 못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 충분히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왜…?”(Why?)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Who?)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첫째 아기 주영이가 질병으로 죽어갈 때 “왜?”라는 질문을 아무리 던져보아도 그 대답을 얻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라는 질문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 Who is my God?”(나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시사 오히려 주영이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랍고 굉장한 구원의 사랑을 찬양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어떻게?”(How?)라는 질문도 던져 보았고(어떻게 아기가 이러한 질병에 걸렸는지 의학적으로도 질문을 던져보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What)이신가 라는 질문도 수 없이 던져 보았지만 그 답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질문들을 던지면 던질 수록 낙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망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은 누구(Who)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아기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어가는 아기나 저나 아내의 생각, 감정,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모든 일(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시므로 아기의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그 굉장하고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조금 더 깊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게 체험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때부터 어떠한 위기와 역경이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할 때 내주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저로 하여금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고 의지케 하십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의지케 하시사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나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게 하십니다(롬8:28).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그를 해하려 하였던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50:20)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사 선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고 계십니다(시34:8).  그러기에 저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  All the time, God is good!”(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넓게, 많이, 높게 깨달아 알아가길 기원하는(엡3:18-19),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9월 2일, 사랑하는 김흥중 형제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