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나의 소망이 된 재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 애가 3장 18-22절).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특히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생각할 때 ‘왜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셨는지 너무나 불공평하시다’ 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공의로 행하신다면 죄의 삯은 사망이란 말씀(롬6:23)대로 우리 모두는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원히 멸망당하고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저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요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사(엡1:4)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땅이 우리 모두가 영원히 멸망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3:16).  어느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이 왠지 불공평하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어젯 밤 오늘 새벽기도회 읽을 예레미야 애가 3장에서 5장을 말씀을 읽기 시작하다가 저는 오늘 본문 3장 18-22절 말씀에서 멈췄습니다.  작년에도, 제 작년에도, 아니 매년 마다 새벽기도회 때 읽었던 말씀이요 또한 묵상도 했던 말씀인데 그날 밤 따라 제 시선을 그 구절들에 멈춰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에 무엇을(“이것을”) 담아 두었길래 “그것이 오히려 나(그)의 소망이 되었”을까?(21절), ‘분명히 그는 18절 하반절에서 “내(자기)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했었는데 왜 21절에 와서는 다시금 소망케 되었을까?’, ‘그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것”/”그것”(21절)이 무엇인가?’, ‘그것은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이구나’, ‘그러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쑥과 같이 쓴 고초와 재난으로써 하나님께서 회개치 아니하는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을 하니님의 크신 진노(5:22)의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벌하신(4:22) 결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히려 그것이 그의 소망이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능은 고초와 재난을 당하면 낙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 마음에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었다(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도 고초와 재난을 생각할 때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낙심도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아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소망이 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에 마땅히 유다 백성들이 다 진멸을 당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공평함인데) 하나님께서는 크신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다 진멸하지 않으시고 남겨두셨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재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신(히7:26) 예수님에게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시사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 분에게 담당시키시사(사53:6) 고난가운데 십자가에 못밖혀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징벌로 인하여 재난을 당할 때에도 그 재난이 처음엔 비록 우리를 낙심시킬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재난이 “나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궁한 인자하심과 긍휼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크신 성실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23절).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일세” [새찬송가 95장, 5절].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바라보므로 소망음 품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8월 26일, 재난을 통하여 내 자신이 마땅이 영원히 죽을 수 바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