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 (1)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5장 3-5절).

 

            가끔 저는 차 안에서 뉴스를 듣다가 또는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뉴스를 듣다가 그냥 꺼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뉴스를 통해서 들리는 소식마다  좋은 소식은 없고 거의 다 나쁜 소식들이기에 듣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 들을 수록 마음의 평안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어쩔 때는 뉴스를 듣다 보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악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번 있습니다.  또 어쩔 때는 뉴스를 듣다 보면 죽은 사람(들)이 안되보이고 그 사람의 유가족 식구는 얼마나 슬프고 힘들까 라는 생각도 들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뉴스를 듣다 보면 화가 나기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들리는 소식마다 슬프고 낙심되는 소식들 뿐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쩔 때는 더 이상 뉴스를 듣고 싶지 않아 그냥 라디오나 TV나 인터넷을 꺼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45장 3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였던 바룩이란 사람이 나옵니다(1절).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성경 예레미야서를 기록하면서 고통에 슬픔을 더함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3절).  왜 그랬을까요?  왜 바룩은 고통에 슬픔과 탄식과 피곤 속에서 평안을 찾지 못했을까요?  한번 바룩에 입장에 서서 상상해 보십시오.  바룩의 입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불러 주는 대로 예레미야서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데 그 적는 말이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인데 어떻게 고통과 슬픔과 탄식이 없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심판의 메시지(2-25장)는 한 마디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40-45, 52장).  그래서 예레미야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칼’(71회), ‘기근’(33회), ‘황폐’, ‘멸망’(33회), ‘진노’(24회), ‘온역’(17회)이란 단어들이 자주 접하게 됩니다(인터넷).  물론 예레미야서는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복의 메시지요 구원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서의 초점은 심판이라기 보다 회복이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말씀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받아 적어 내려가고 있었던 바룩의 입장에서 예레미야 45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받아 적어 내려가고 있었기에 그는 고통과 슬픔과 탄식과 피곤 속에서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었던 바룩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위로의 말씀을 한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룩으로 하여금 주권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45장 4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셔서 바룩에게 이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세운 것도 헐기도 하시고 심은 것도 뽑기도 하시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라는 사실을 바룩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믿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운 것을 허시고 심은 것을 뽑으신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 그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탄으로 하여금 욥에게 임하도록 허락하신 모든 재앙(1:12-19) 가운데서도 욥은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22절) 오히려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습니다(20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던 욥은 그 극심한 재앙 가운데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21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탄이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므로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끍고 있었던 욥에게 그의 아내가 “당신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7-9)고 말했을 때 욥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10절).  그러면서 욥은 “이 모든 일에 …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10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룩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치 않고 있는 교회를 징벌하시므로 신랑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부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엡5:27)로 세우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과 우리 가운데 “쓴 뿌리”가 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여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럽게 되는 것을 막으시고자(히12:15) 고난(환난)을 통하여 그 쓴 뿌리를 뽑으신다면 우리는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믿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슬픔과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며 그 분의 주권적인 하늘에 이미 이루신 것처럼 이 땅에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45장 5절을 보십시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셔서 바룩에게 이르라고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구원의 약속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략물 주듯 하리라”는 말씀은 전쟁시에 위태한 가운데서라도 생명 재산을 빼앗기지 않게 된 것처럼, 아주 위태하여 아슬아슬한 가운데서라도 바룩의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바룩에게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불러 주는대로 예레미야서 책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으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 및 탄식 속에서 지쳐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3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모든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는 아주 위태하여 아슬아슬한 가운데서라도 그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들렸주시니 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에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큰 고통과 슬픔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함을 많이 느낌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문제는 하나님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으시고 오히려 침묵하시는 것이 우리를 더욱더 불안하게 하며 심지어 우리의 영혼을 낙망케 할 때까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애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11; 43:5).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고 인내하며 견딥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믿음과 소망 중에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의 때에(비록 그 때가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아슬아슬할 때이지만)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은 소성케 하십니다(시편 119:107, 개혁한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위로를 받기보다 위로를 하는 사람들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쩌면 우리는 고통와 슬픔을 수 없이 겪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과 그 슬픈 환경을 바라보기 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고통과 슬픔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세움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사40:1).  그리할 때에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할 수가 있습니다(고후1:4).  그 결과 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와 그들 속에 역사하므로 우리는 고난을 견뎌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6절).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위로 받기 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8월 22일, ‘주님, 저를 주님의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