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사야 64장 8, 12절).

 

 

            어제 화요일 오후 아내로부터 사진과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 막둥이가 수건을 들고 물마시는 곳에 서 있는 모습과 함께 아내는 저에게 “Guess where we are?”(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맞춰보세요)라고 문자를 보내 왔습니다.  저는 그 자신을 보자마다 아내와 예은이가 있는 곳이 YMCA에 인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 곳을 일 주일에 세 번 정도 운동하러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지금 곧장 갈께’라고 문자를 보낸 후 부랴부랴 운전해서 YMCA로 갔습니다.  도착해서 우선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아내와 예은이를 찾았는데 예은이가 저를 보자 마자 저에게 다가와 저를 껴안아(hug) 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은이가 엄마와 아빠와 함께 YMCA에 운동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은이의 운동하는 모습을 사진 찍은 후 나중엔 아내에게 예은이와 저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찍었습니다.  그런 후 아내와 예은이는 운동을 다 했는지 이젠 집으로 가야 겠다고 하여 저는 먼저 가라고 한 후 그냥 저 혼자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있다가 예은이가 저를 어떻게 찾았는지 저에게 다가 와서 YMCA에 2층도 엄마랑 구경하고 왔다고 등등 말하면서 가길래 저도 운동을 하다 말고 예은이를 좇아가 배웅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쪽으로 걸어가던 예은이가 갑자기 뒤돌아 서서 다시 저에게 와서 저를 껴안아 주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은이는 아랑곳 없이 이 아빠에게 다가와서 저를 꼭 껴안아 준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선물로 주신 세 자녀들 중에 막둥이 예은이하고의 추억이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쓰고 있는 “가정 이야기”들 중에 아마 거의 90% 이상이 막둥이 예은이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 그 아이와의 추억거리들이 참 많습니다.  그 추억 거리들 중 제가 잊지 못하는 기억은 제가 세 자녀들을 징계할 때에 막둥이 예은이가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넘어져서 막 우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예은이는 오빠와 언니가 먼저 매맞는 모습을 보고 많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울고 있는 예은이를 일으켜 매로 징계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기억납니다.  아이들을 다 자기 방으로 보낸 후 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눈믈을 훌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왜 울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우는 아이들을 볼 때에 측은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뒤돌아 볼 때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고 너무나 부족한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이들을 징계해서 아프게 한 것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많이 아팠을 텐데…  특히 막둥이 예은이는 매우 두렵고 많이 아팠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64장 12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일이 이러하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이란 바로 “주의 거룩한 성들이 파괴되고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과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양하던 거룩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성전이 불에 탔으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곳이 다 황무지가” 된 것[10-11절(현대인의 성경)]을 가리킵니다.  왜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입니까?  왜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탄 것입니까?  왜 그들이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소멸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사야 65장 7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보응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괴로움(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64:12)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충분히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도 아무 기도 응답이 없다면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 왜 아직도 가만히 계십니까?  주님, 왜 아직도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겪고 있는 심한 괴로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면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절망 가운데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라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울부 짖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우리가 심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지, 어느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실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몸부리치면서 울부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시35:17)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1:2)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16:28),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14:11),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시4:2).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심한 괴로움을 당할 때 그 고통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길 원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를 사해주시고 정결케 하시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이 천지 차이일진데(사55:8-9)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충분히 깨달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는 사실입니다(64:8).  그리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토기장이”이시다 라는 사실입니다(8절).  그리고 우리는 토기장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진흙과 같은 우리를 빚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빚으실 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분의 주권 속에서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십니다(롬9:21).  그리고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분의 주권 속에서 어떤 사람은 “고난의 풀무”(사48:10)에서 좀 오래 단련시키시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들 오래 단련시키십니다(시66:10).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하십니다(욥23:10).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물건인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반문할 수가 없습니다(20절).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왜 저를 이렇게 오래 고난의 풀무에 두셔서 저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까?’라고 반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반문해서는 아니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찌라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새찬송가 540장).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롬12:2).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8:28).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3:16).  한 마디로,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사64:8).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계셨을 때 가만히 계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침묵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사53:7)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데도 침묵하시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다 부정하고 다 더러우며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바람 같이 몰아가는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히 소멸될 수 밖에 없는(사64:6-7)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지 않으시며(9절) 우리를 구원하시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습3:17).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의 생각은 평안이요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다(렘29:11).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우리에)게 평안을 주려 하심”입니다(사38:17).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등 뒤에 던지게 하시고자 우리에게 큰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17절).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님께 가야 합니다(새찬송가 272장 1절).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사(눅15:20) 십자가에 벌리신 팔로 우리는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품 안에 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가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8월 6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한 영혼을 사모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