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뜻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기 23장 13-14절).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국무총리 후보자의 과거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 그 논란의 핵심이 과거 그가 교회 강연에서 일본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인터넷 상에서 보닌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비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후보자의 강연 동영상을 다 보고 난 후 그 장로님이 왜 그렇게 얘기를 했는지 좀 이해를 하였는지 그 분을 위하여 기도해야 겠다는 댓글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그 국무총리 후보자의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말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을 한 3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기에(고전1:21) 그들은 하나님의 뜻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하나님을 알기에(지금도 알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 외에도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2장 37-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셋째로, 그렇지만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 있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를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사람의 생각보다 높을진데(사55:9) 어떻게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개개인의 삶이던 가정의 삶이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던 우리 나라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저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라고 어떻게 우리가 확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말씀에서 명백히 기록된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함부러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라’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는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확신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에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직접(?) 음성을 들어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말은 믿지 않는 자들 앞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성령님께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허락지 않으시고(행16:7) 오히려 다른 길로 인도하실 경우 그 다른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8-10절)하게 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과 그의 동역자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나아갈 때에도 우리는 ‘이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그런 경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지기 마음에 둔 마리아 처럼(눅2:50-51) 우리는 그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우리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여기 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욥기 23장 13절을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욥이란 사람이 “그는(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시”다 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뜻은 유일무이(unique)하다’[오직 하나뿐이고 둘도 없다(독특하다, 특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God is one)임].  홀로 한분이신 하나님께서 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1:1, 8; 2:3) 욥으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을 격도록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소유물과 그를 치게 허락하셨는지(1:12; 2:6)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God’s permissive will)] 그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뜻을 고통당하고 있는 욥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와중에 욥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23:3).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23장 8-9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던 욥은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은 찾은바 되지 않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이지 않으며 답변이 없으시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그 4가지 교훈을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욥기 23장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나에게 허락하셨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찾아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는지 우리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악인의 형통하는데 왜 의인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심지어 시편 기자 아삽처럼 이렇게 자신에게 스스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현대인의 성경)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허사구나”](시73:13).  충분히 우리는 낙담하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서 의인의 길을 버리고 악인의 길로 향하고자 하는 유혹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 유혹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참고: 호6:3, 벧후3:18, 빌3:8).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는 길을 아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아가되 우리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 보시고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39:1).  아시되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2절).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시며(3절) 우리 혀의 말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은(4절)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밝히 알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는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일 잘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고통의 목적과 뜻도 밝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 길이 고통의 길이라 할지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23:4) 전지하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할찌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제일 잘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지으시며 우리의 모태에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에(시139:13) 하나님은 우리를 제일 잘 아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은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일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단련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그 고통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복종시켜 그 고통의 현실을 믿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의 길을 주님만 바라보면서 묵묵히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해야 하는 이유는 고통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고통이 포장된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인내하며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욥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단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을 통해서라도 단련하시는 것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10절).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순수하지 못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믿음에는 인본주의(와 물질주의 등이)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믿음을 순금같은 믿음으로 정화시키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릴 수가 있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제일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란 사실 외에도(시139) 우리를 제일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일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요일4:10).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참고: 신1:27)  아닙니다.  많은 때에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죄의 결과요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욥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련”을 통하여 “순금 같이 되어 나오”는 것(욥23:10)외에도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순종함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면(히5:8) 우리는 더욱더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 순종함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고통 중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따라가야 합니다.

 

욥기 23장 11절을 보십시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걸음을 바로(가까이) 따랐으며 그 주님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중에서 충분히 주님의 길에서 이탈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있었을텐데 어떻게 욥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고 그 입의 말씀을 매일 먹는 음식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까요?  만일 우리가 나를 제일 잘아시고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지(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의심과 불신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도 불순종하며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이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져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오히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이 여겼습니다.  이것이 고통의 또 다른 축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이 여길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 믿어야 합니다.

 

욥기 23장 13-14절을 보십시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은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작정하신 것을 욥은 이루실 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돌이킬 수 없음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이런 일이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그 주권적인 뜻안에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이 있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반드시 그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2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3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4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새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나의 삶과 심지어 나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뤄지길 기도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6월 13일,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새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를 마음으로 찬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