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

 

 

“그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6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않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왕들을 그대로 본받았다.  그는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산당과 산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다” (열왕기하 16장 2-4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은 어른이라는게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한국 세월호 여객선 침몰의 관한 뉴스를 접하면 접할 수록 어른이라는게 더욱더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젋은 학생들의 생명보다 자기들의 생명을 그리고 그 학생들의 안전보다 돈을 더 우선한 어른들을 볼 때에 살아 있는 수 많은 젊은 학생들의 비극은 본 받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일 그들에게 믿고 의지하며 따르고 싶은 어른 또는 그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며 본받고 싶은 어른이 없다면 과연 그들의 앞날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른들이 먼저 본 받을 만한 사람이 되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본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위에 젊은 학생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에게 욕을 먹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면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6장 2-4절에는 유다의 왕 아하스란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이 그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하면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않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는데(15:34) 아하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할아버지인 웃시야도 “자기 아버지 아마샤를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지만(3절) 아하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아마샤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는데(14:3) 아하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하스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을 행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적어도 3가지 옳치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하스는 이스라엘 왕들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6장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들을 그대로 본받았다 ….”  성경은 남쪽 유다 왕 아하스가 북쪽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본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고 또한 어이가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니 왜 본받을 만한 자기 아버지 요담과 할아버지 웃시야 그리고 증조 할아버지 아마샤를 본받지 않고 본 받지 말아야 할 북쪽 이스라엘 왕들을 본받았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북쪽 이스라엘 왕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함을 본받아 죄에서 떠나 않았”던 자들인데(참고: 13:2, 11) 왜 유다 왕 아하스는 왜 그들은 본받았는지 이상하고 좀 어이가 없습니다.  특히 그 북쪽 이스라엘 왕들은 여로보암을 본받아 우상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인물들인에 왜 유다 왕 아하스가 그들을 그대로 본받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북쪽 이스라엘 왕들처럼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산당과 산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습니다(16:3-4).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은 본 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본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신앙의 조상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지금 우리는 작은 예수님의 모습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적인 사람들은 자꾸만 본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입술로는 교회 안에 있는 세상적인 어른들을 보면서 그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정죄까지 하면서 실제 우리 삶으로는 그들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까?  현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래서 그런 겁니까?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지혜(약3:15)와 세상적인 정욕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절제하지 못하면서(딛2:12) 세상적인 일만 생각하는(빌3:19)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적인 사람들을 우리의 역활 모델(role model)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역활 모델로 삼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어른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의지하였습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유다 왕 아하스는 이스라엘 왕들을 본받아 하나님께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었을 때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했습니다(5절).  좀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성경은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연합해서 유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한 시점이 “그때”(5절) 즉, 아하스가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며 “산당과 산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고 있었을 때였을까요?(3-4절)  저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는 우연이 없습니다(다만 우리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에 우연일 뿐임).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켜 행하시고자 하셨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을 행하고 있었던 아하스를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를 통하여 징계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르신 왕과 베가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했지만 그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절).  어떻게 더 강하고 힘쎈 아람의 왕과 이스라엘의 왕이 연합으로 유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도 그들은 아하스와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르신 왕과 베가 왕으로 하여금 아하스 왕과 싸워 이기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5절).  그런데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다시 장악하여 거기에 사는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아람 사람들을 거기에 보내 살게 하였다고 하여(6절)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7절)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7절, 대하28:16).  그가 그리한 이유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그의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사7:2).  그래서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을 보내면서(왕하16:8)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9절).  그는 곤고할 때에 더욱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대하28:22).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을 의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는데(사7:3, 7) 아하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9절).  그래서 그는 의지하지 말았어야 할 앗수르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까지 내어다가 그에게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임(시121:2)을 잃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했을 때 앗수르 왕은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아람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9절).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앗수르 왕을 의지하여 그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은 오히려 아하스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더욱더 의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하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징벌인 것은 로마서 1장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4, 26, 28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마음의 죄악된 본능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성경 구절 석 절만 적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그리고 비방이다” (마1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5:19-21),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을 의지하여 그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앗수르 왕이 곧 올라와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과 전쟁에서 패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아하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전쟁에서 패했다면 아하스는 자기가 사람을 의지하였던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지해서 자기가 원하고 의도하고 계획한대로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아하스가 얼마나 더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했었을까 생각해 볼 때 다시 한번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임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셋째로, 아하스는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6장 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들을 그대로 본받았다.  그는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유다 왕 아하스는 본 받지 말아야 이스라엘 왕들만 그대로 본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도 본받았습니다.  그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이란 앗수르 왕이 정복한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10절) 그로 하여금 같은 제단을 만들게 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돌아와 그 제단을 보고 그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렸습니다(12절).  그가 그리한 이유는 다메섹 신들이 아람 왕들을 도왔으니 자기도 그 신들에게 제사하면 자기를 도울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대하28:23).  그래서 아하스는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였습니다(24-25절).  그러나 그가 의지하고 도와 줄 줄 알았던 아람의 신들은 아하스와 그 백성을 망하게 하였습니다(23절).  그리고 그는 “그의 조상들을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습니다(25절).  그는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습니다(19절).  그 결과 그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사7:9).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왕하16:20).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은 이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롬12:1)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요일 2:15).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딛2:12).  우리는 아직도 “옛날의 생활 방식, 곧 거짓된 욕망으로 부패해 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엡3:22).  우리는 아직도 “음란과 온갖 더러운 것과 욕심”(5:3)을 쫓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헛된 생각으로 무가치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17).  지금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5:11).  결코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어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어른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본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의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을 본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치 않은 일을 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5월 2일, 다가오는 세상에 마음과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