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하나요?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사무엘상 23장 3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24장4절);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5:26).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오래 전 어느 어르신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5가지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 때 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그 5가지 방법이란 (1) 성경을 통해서, (2) 성령을 통해서, (3) 기도를 통해서, (4) 신앙의 선배를 통해서, (5) 환경을 통해서 인 것 같습니다.  이 5가지 방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사람(신앙의 선배)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3장 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서 그 추수한 곡식을 약탈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고(1절)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2절).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2절).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윗은 자기 사람들의 말도 듣습니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3절).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두려움 가운데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란 만일 그들이 다윗과 함께 그일라에가게 되면 사울 왕에게 잡혀 죽임을 당할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다윗이 그의 사람들과 함께 그일라에 갔다는 말을 사울이 들었을 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7절).  그러므로 이들의 말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묻습니다(4절).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윗에게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4절).  이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결국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그일라로 갑니다(5절).  즉, 다윗은 자기의 사람들의 말보다 두번이나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일라고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합니다(5절).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윗의 입장에 서서 다윗의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일라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뻔히 갇힌바 되어 사울에게 잡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큰 위험부담이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4장 4절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말을 들은 사울이(1절) 정예병 3,000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로 ‘들염소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2절).  그 곳 길가에 양우리가 있고 그 곁에는 굴이 있었는데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그 곳 굴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동굴의 깊숙한 곳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3절).  그 때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현대인의 성경) “이제 당신의 때가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당신에게 넘겨 줄 테니 좋을대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살금살금 사울에게 다가가서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자릅니다(4절).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5절).  왜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였기 때문입니다(6절).  그래서 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합니다(7절).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윗의 입장에 서서 다윗의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상황에 따른 관점으로 보면 그 엔게디 굴에서 사울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 사울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사울을 죽이려고(10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헤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다윗처럼 엔게디 굴에서 원수 사울을 만났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그를 헤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상황에 따른 관점(Situational perspective)보다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 또는 규범적 관점(Normative perspective)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황적인 관점조차도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에게 지배를 받아야 하며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5장 26절을 보면 완고하고 행실히 악하며(3절) 불량한 사람(17, 25절)이요 미련한 자(25절)인 나발의 아내인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3절) 아비가일이란 여인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내”고(23절) 다윗에게 한 말(24-31절) 중에 이러한 말도 합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당신이 직접 당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 보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과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의 모든 원수들과 당신을 해하려고 하는 자들은 나발처럼 벌을 받을 것입니다”](26절).  그녀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자기의 남편인 나발이 그의 종들을 매우 선대한(15절) 다윗의 선[다윗의 부하들이 나발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줘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21절, 참고: 15-16절)]을 악으로 갚되(21절) 다윗이 광야에서 보낸 그의 부하들을 나발이 모역하였으므로 말미암아(14절) 다윗이 나발과 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17절, 참고: 22절).  이 아비가일의 말을 들은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2-34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녀가 한 말 중에 “당신이 직접 당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 보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금하셨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란 말은 보복하는 것은 “악한 일”이요(28, 39절) 보복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24:12)을 다윗으로 하여금 상기시키게 한 것 같습니다.  또한 그녀가 한 말 중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3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시고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당신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다든지 복수했다는 일로 후회하거나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30절)란 말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 왕의 옷자락을 살며시 자르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24:4-5)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아바가일의 말을 듣고 나발에게 복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통하여 자기가 친히 복수하는 것을 막으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33-34절).  결국 나발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임을 당합니다(38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보복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성경에는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다. 내가 갚아 주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지혜로운 사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으로 올바른 말을 할 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악으로 선을 갚는 나발과 같이 불량하고 미련한 사람에게 우리가 친히 복수하고 싶고 그런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 우리에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선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특히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으로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녀가 상황에 따른 관점이나 개인적인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으로 우리에게 말을 할 때 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입술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던지 감정(두려움이나 복수심 등등)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으로 고려(평가)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주시는 분별력으로 그들의 말을 판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지 안한지를 판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환경적인 요소도 성경적인 원리 원칙의 관점으로 판별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상황인지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상황인지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롭게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소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8),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4월 3일,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기원하면서(골 4:2)]